어느 기업인의 트레킹 이야기(4)...장사꾼 남편의 무사귀한 빌던 길 "달하 노피곰 도다샤 머리곰 비취오시라"

▲ 박성기 대표

[외부 기고=박성기 도보여행가, 도서출판 깊은 샘 대표]

2017년 9월 2일 토요일.

가을은 이미 곁에 와 이른 새벽,
목 위까지 지퍼를 올리고 팔목 아래로 소매를 당겼다.
걷기에는 그만이다.

우리 같은 직장인들이 걸으면서 스트레스를 풀기에도 아주 좋은 계절이다.

정읍사(井邑詞)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요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보편적 정서를 소유하고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가사로 조선시대의 의궤(儀軌)와 악보를 정리하여 성현(成俔) 등이 편찬한  <악학궤범>에 한글로 기록된 것이 오늘에 전해졌다. 내용은 멀리 외지로 장사를 나간 사랑하는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가사이다.

옛날과 지금의 시간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얽혀든다.

져재(시장)에 물건을 내고 각시 줄 선물을 봇짐에 싸든 사내는 저쪽에서 오고 있다. 달은 높이 솟아 온 산중을 밝게 비추고 사내는 달빛을 길 삼아 시간 속으로 겅중겅중 걸어 들어간다.

님 기다리는 여인의 마음은 달빛 환한 망부석에서 무슨 생각으로 노래를 했을까?

무심한 사람이다. 멀리 외지로 장사 나간 남편은 벌써 여러 날이 지났는데도 기척조차 없다. 혹여 밤에 돌아오다 남편이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어 기다리는 아내는 애통이 터진다. 아내는 정성 가득한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아양산 중턱 망부석에 올라 남편이 돌아올까 길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노래를 불렀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데를 드데욜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정읍사井邑詞)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오늘은 정읍사공원에서 내장저수지까지 이어진 정읍사 오솔길 1코스를 걷는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를 만남, 환희, 고뇌, 언약, 실천, 탄탄, 지킴 등 7가지 주제로 스토리텔링한 길이다.
 
공원으로 들어서니 약수를 길러 온 사람들로 북적인다. 정한수 떠놓고 기도하던 정읍사 샘물이기에 사람도 많다. 이름도 맞춘 듯 ‘달님약수’이다. 샘물이 풍부한걸 보면 정(井)이 우물을 뜻하는 정읍의 지명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전북과학대학교를 돌아 천년고개에 다가섰다.

이정표를 지나니 월봉등산로를 따라 초입이 나무계단이다. 마주 오는 사람들을 보고 반갑게 인사를 하고는 계단을 밟고 올랐다. 송월고개를 오르는 길 따라 펼쳐진 소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주어 숲길을 이루고 있다. 야생화들도 입을 벌리고 반갑게 맞아준다. 숲길은 월봉(月峯) 등산로를 따라 죽 이어간다. 월봉이란 이름은 아마도 정읍사의 “달하”에서 유래되었으리라.

길을 따라 1km남짓 오르니 남사면 전망대가 있다.

멀리 노령의 등줄기가 병풍처럼 입암산과 방장산으로 이어졌다. 땀을 식히고 조금 더 지나 산등성을 타고 넘으니 북사면 전망대가 있다. 일곱 봉우리가 춤을 추는 정읍의 진산인 칠보산과 귀양실재가 보인다.

낮은 산 숲길은 작은 산굽이가 많다. 돌아들면 새로운 길이 나오고 길이 자꾸 궁금해진다. 한 구비를 돌때마다 사연이 있고 새로운 길이 반기니 길이 재미있다.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다시 길을 나서 쉼터를 지나 송학고개를 넘으니 가파른 오름이다. 턱밑까지 차는 숨을 깊게 토해내며 고갯길을 오르자 두꺼비 모양 바위가 보인다. 바위 옆으로는 연인들의 마음을 잠가두 듯 사랑의 염원을 담은 자물쇠들로 가득하다. 매달린 자물쇠마다 언약의 글을 적은 메모지로 빼곡하다. 만나고 헤어짐이 자물쇠로 가둔다고 가둬지는 게 아닌데 마음이 그러하니 애틋하다.

두꺼비 바위를 출발하니 길은 급전직하 가파르게 내리막길이다. 내내 소나무 숲길을 걸었는데 소나무가 무성하다. 한참을 가파르게 내려가다 다시 오르막이다. 계속해서 야트막한 산등성을 오르내리자 월영 갈림길 월영습지안내소에 도착했다. 이정표에는 탄탄대로가 우측으로 돌아가야 한다. 좌측으로 월영마을 이정표다.

안내소 안에 계시던 노인 한 분이 나와서 좌측 월영아래습지를 보고가라 알려준다. 우측으로 가지 않고 좌측 월영습지로 방향을 틀었다.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작은 월영 아래습지는 산 비탈면에서 공급되는 풍부한 용출수와 빗물이 고여 형성된 저층습지다. 예전에는 용출수를 이용하는 논이었으나 농사를 짓지 않은 이후 습지로 변했다. 습지에는 버드나무, 갈대, 고마리, 갯버들, 선버들, 물봉선 등 수많은 식물군이 군락을 이루며 발걸음을 더디게 하였다. 향긋한 풀냄새와 청정한 공기는 말할 수 없는 청량함을 선사한다.

월영습지는 작은 월영 윗습지, 작은 월영 아래습지, 큰 월영 윗습지, 큰 월영 아래습지 등 총 4군데가 조성중인데 먼저 작은 월영 아래습지가 완성이 되었다. 너무나 아름답다. 모두 완성이 된 후 꼭 다시 와보리라 작정을 하고 탄탄대로로 접어들었다.

탄탄대로는 소가 끄는 달구지가 지나갈 정도로 길이 좋았다. 예전 이곳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오고갔으리라. 길은 내장터널갈림길을 지나 서래원고개를 향했다. 길의 마지막이라 그런지 만만치가 않다. 밑으로 죽 내려가다가 다시 올라 치기를 세 번 쯤 했을까, 어느덧 종착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월영마을이 1킬로 남았다는 이정표를 보면서 다시 걷기 시작했다.

▲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시누대길이다.

시누대는 어렸을 적 내 놀잇감이었다. 대를 가늘게 다듬어 연을 만들어 들판을 쏘다니기도 하고, 활을 만들어 활쏘기를 하였다. 활시위를 팽팽히 당겨 쏘면 하늘높이 날아 한참이고 보이지 않게 날아갔다. 아주 위험했지만 어렸을 적 그렇게 놀았던 추억이 시누대에 있다. 시누대길은 200여 미터를 두고 울창한 터널을 이뤄 장관이다.

시누대길을 지나니 월영마을이다.

내장저수지에선 마이크 소리가 시끄럽게 웅웅거리고 내 발걸음은 종착지인 월영마을 문화광장에 도착하며 아름다운 길을 마감했다.

님 마중하는 길은 걷는 내내 싱그러웠고 상쾌했다. 특히 월영습지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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