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칼럼]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97년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에는, 진보계열 유력 정치인들이 겪는 ‘레드 콤플렉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군사독재정권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공작을 벌인 악영향이 수 십 년을 지나도 완전히 씻어 내려가지 않았다.

이런 정치공작에 깊게 세뇌된 당시 국민들의 걱정을 묘사하면 이렇다.

“민주주의, 인권 주장하던 사람이 대통령이 돼서 본색을 드러낸다. 청와대에 앉아서 조그마한 단파라디오를 꺼내놓는다. 거기서 난수형태로 흘러나오는 북한의 지령문을 열심히 받아 적어서 그 내용을 풀어 이대로 정책을 시행한다. 그 결과, 다음날 서울시청을 비롯한 주요 건물에는 인공기가 올라가고 한국은 ‘적화’된다.”

이런 황당한 생각에 젖어 살던 사람들마저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열린 이산가족 상봉을 보면서 눈물을 마구 쏟았다. 이산가족 상봉이 이후 몇 차례 반복되면서 감동이 무뎌져서 그렇지 이금희 아나운서를 포함한 제1차 상봉 때는 TV로 지켜보는 사람들 모두 흐르는 눈물을 계속 닦아야만 했다.

1998년 이후 진보성향의 대통령이 10년을 이어서 집권했다. 그럼에도 서울시내 그 어느 곳에도 인공기는 올라가지 않았고 한국이 적화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군사독재자들이 심어놓은 공작의 실체가 드러났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 한국국민들의 진보 정치인에 대한 ‘레드 콤플렉스’나 매카시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선거 때마다 ‘종북 프레임’이라는 어휘가 나오는 것이 방증이다.

그러나 김대중 노무현 두 전임 대통령의 통치 10년 이후 ‘레드 콤플렉스’는 일종의 형태변화를 보이고 있다.

전에는 군사독재정권의 공작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후는 진보정권의 안보정책에 대한 평가가 새로운 레드콤플렉스, 또는 새로운 매카시즘의 토대가 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성향의 정당들이 여전히 대중소통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최근 북한 관련 뉴스는 문재인 대통령과 현 정부에 대한 ‘용공’ 걱정, 다시 말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움직인다는 퇴행적이고 케케묵은 비방은 이제 완전히 이 사회에서 소멸시켜야 할 때가 됐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주재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은 집권 후 북한과의 대화는 필요하다는 점을 밝혔다가 북한의 거듭된 미사일 발사와 핵 실험으로 인해 “지금은 대화가 불가하다”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정부일각에서는 지난 14일 북한에 대한 800만 달러규모 인도적 지원 의사를 밝혔는데 그로부터 연 이틀 북한은 미사일을 발사했다.

누구든 정상적 판단을 가진 사람이라면, 문재인 정부의 앞선 대화시도가 절대로 북한의 ‘지령’이나 ‘희망’에 따른 것이 아님을 명백히 알아볼 수 있다. 그냥 한국정부 혼자서 북한은 생각도 없는 ‘대화’나 ‘지원’을 얘기했던 것이다.

많은 전문가들의 냉철한 판단은, 북한은 지금 핵보유국 인정을 통해 미국과의 평화협정, 더 나아가 관계 정상화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 최고지도부가 3대 세습을 하면서 내내 숙원으로 삼고 있는 목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두 차례나 위협적인 미사일을 일본의 상공을 통해 태평양으로 보냈다. 조금만 계획에 차질이 발생해도 북한은 지금 당장 감당하기 힘든 응징을 자초할 일이다.

이렇게 상대는 선대로부터의 숙원을 달성하려는 목표에 완전히 비장하게 몰입해 있는데, 이런 상황에서 “의약품 800만 달러 가져가라”는 한가한 얘기가 어떻게 들렸을까.

한국의 이런저런 제의를 들은 척도 안하다가 북한이 한번 내놓은 반응이 “무슨 ‘운전석’과 같은 헛소리 그만하고 자기 분수에 맞는 자리를 찾아가 앉아 있으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대화제의를 해봐야 절대로 환영도 못 받고, 친절한 냉수 한 사발 대접받을 때도 아니라는 얘기다.

그런데도 자꾸 ‘남북대화 제의’를 뉴스에 장식하려는 당국자들이 있다면, 절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되는 ‘몽상가’라고 할 수밖에 없다. 통일에 대한 신심이 아니라 무슨 업적이라고 자기 이름을 남기는 데나 혈안이 된 그런 사람을 말한다.

한국의 통일과 국제정세에 대해 학문적으로 대단히 탁월한 이론을 갖고 있다 해도, 그것을 정책으로 옮길 때는 그때그때의 세부적인 형편을 더 한층 빈틈없이 살펴보고 따져야 한다.

30년이든 100년이든, 궁극적으로 정치의 물리적 힘은 우리를 이렇게 통일시킬 것이라고 하는 건 논문에 쓸 얘기지, 세금을 가지고 당장 하루하루를 재고 따져야 하는 국정에서 할 소리가 아니다.

몽상가들의 헛발질이 계속되면, 또 다시 민간에서는 군사독재자 시절의 ‘레드 콤플렉스’가 자연발생적으로 만연하게 된다. 한국에서 진보성향 정권이 제일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어떻든 북한의 연이은 무시로 인해, 지긋지긋한 ‘종북’ 시비를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내놓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그건 논리적으로 그렇다는 얘기지, 다수 대중들이 심정적으로 그렇게 대할지는 잘 모르겠다.

따지고보면, 지난 9년간 연평도 포격을 비롯한 북한의 도발로 인해 가장 크게 정치적 피해를 입은 것은 현재의 집권당이다. 이 또한 현 정부가 종북이 아니라는 하나의 방증이 된다. 그런데 인구가 5000만 명을 넘는 큰 나라에서는 논리보다 정서가 정치에서 더 강하게 작용을 한다. 논문을 쓰다가 국정에 동참하게 됐다면, 이런 속성을 잘 알아야 모시는 분에게 누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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