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업인의 추석 트레킹 이야기(7)...'세곡선' 가득하던 나루는 흔적만 남아

▲ 박성기 대표

[외부 기고=박성기 도보여행가, 도서출판 깊은 샘 대표]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이번엔 충주 중앙탑에서 목계나루까지 중원역사문화 길 11.7 킬로를 걷는다. 역사적으로 교통, 물류의 요충지로 경제적 가치가 큰 곳이다.

또한 이곳은 중원의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 신라가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자웅을 겨루던 곳이기도 하다. 

탄금대가 남한강을 오연히 굽어보고 있는 삼국 역사의 중심을 통과하는 길이다.

길은 중앙탑에서 시작했다. 

▲ 충주 탑평리 7층 석탑. 중앙탑이라고도 불린다.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탑의 정식명칭은 충주 탑평리 7층 석탑으로 국보 6호다. 예전엔 충주를 중원이라고 칭하여서 중원탑으로 해야지 중앙탑은 일제의 영향인 듯해서 거부감이 들었다. 언제부터 중앙탑이라 불려졌는지 모르겠으나 일제강점기인 1916년 작성된 탑의 수리에 관한 문서에서 중앙탑을 기술하고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중앙탑을 거쳐 남한강을 따라 걷는다. 그리고는 탄금호 철새조망대를 지나 탑평교를 건넜다. 

충주(중원) 고구려비 전시관이다. 

▲ 충주(중원) 고구려비를 전시한 전시관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용전리 입석마을에는 남한에 하나밖에 없다는 고구려비가 있는 곳이다. 전시관은 위대한 고구려의 유산, 설화, 생활상, 역사와 함께 황해도에 있는 고구려의 벽화고분인 안악 3호분, 중국 지린성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충주 고구려비 발견 과정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곳의 이름이 입석마을인데 아주 오래 전부터 돌기둥이 하나 서있기에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복을 축원하는 기원을 많이 드렸을 터이다.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위로 언제 적인지 모를 먼 옛날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으니 영험이 있다고 의지했을 것이다. 

마을을 지켜주는 것으로 여겼던 수호석이 나중에 고구려비라는 것을 알았으니 정말 기막힌 일이다. 돌의 이끼를 제거하고 복원시켰더니 당시대의 역사를 고증하는 아주 귀중한 글자들이 많이 나왔다. 오랜 세월 방치한 탓에 4면 중 3면의 글자가 마모되어 더는 살펴볼 수 없음이 안타까운 일이다. 

전시관 뒤를 돌아 긴 꼬리 형상의 장미산(長尾山) 산길로 접어들었다. 

▲ 복원된 장미산성 성곽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산길을 따라 4킬로를 걸어 중원에 백제가 남긴 장미산성(薔薇山城)을 만났다. 장미산 산허리를 길게 둘러싼 계곡을 끼고 쌓은 포곡(包谷) 석성(石城)이다. 산성의 이름은 장미(薔薇)라는 장수가 쌓았다는 전설에 의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 장미산성 참호의 흔적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남한강을 내려 보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 신라, 백제가 치열한 격전을 벌였을 법한 요충지다. 성벽을 따라 길고 좁은 군사용 참호의 흔적이 남아있다. 

장미산성을 뒤로하고 봉학사를 지나 목적지 목계나루로 향했다. 장천마을을 거쳐 길게 늘어선 장지 늪과 칠음대 늪을 지나 신두 늪에 이르렀다. 목계교 건너 목계나루가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목계교를 건너면 목계나루다. 

목계나루는 강원도 정선 동강에서부터 한강의 마포나루까지 나라를 동서로 가르며 다니던 긴 뱃길의 중심지이자 남한강 수로 운송 교통의 종점이다. 

▲ 남한강 옆 습지의 풍경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나루가 커서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나르던 큰 세곡선이 한꺼번에 20여척이 엇갈려 지날 수 있었다. 100여척의 상선이 정박할 수 있던 나루일대에는 800여 호의 집들이 가득했다. 그러나 남한강을 중심으로 한 물류 교통의 중심이 충북선의 개통으로 규모가 작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쇠퇴해져가던 목계나루는 목계교가 들어서자 나룻배마저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 

눈을 감으면 사람들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장 따라 이리 저리 떠도는 장돌뱅이며 봇짐 가득 서글픈 보부상은 주막 봉놋방에 몸을 녹인다. 막걸리 한 사발에 취기 도도한 취객이 아리랑 한가락 구성지게 불러 제치고, 추임새 넣는 술꾼들 소리와 술파는 아낙네 웃음소리가 뒤섞여 왁작하다.

▲ 목계나루 앞 강가에서 노는 오리들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다시 눈을 뜨니 예전의 북적대던 나루는 간 데 없고, 한가로운 오리와 수십 마리 새들만이 걷는 자를 반기며 물질에 한참이다. 저 멀리 낚시를 즐기는 강태공 몇이 이따금 낚싯대를 들어 올리곤 한다. 

옛 모습은 자취가 없고 몇몇 횟집이 과거를 찾아온 나그네를 반겨준다  

▲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장터'를 새긴 시비 /사진=박성기 대표 제공

신경림 시인의 「목계장터」 시비가 예전의 영화를 새기며 쓸쓸히 서 있을 뿐 적막하기만 하다.  
시비 옆 강변횟집에서 매운탕 한 그릇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과거의 영화를 가늠할 뿐이다.  

목계나루를 통해 오가던 이들이 부른 정선 아리랑 한가락으로 길의 소회를 마친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명사심리가 아니라면 해당화는 왜피며
모춘(慕春) 삼월이 아니라면은 두견새는 왜 울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