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기업인의 ‘추석’ 트레킹 이야기<10>...경제적 이유 떠나 백제의 훼손된 유물, 잘 복원됐으면

▲ 박성기 대표

[외부 기고=박성기 도보 여행가, 도서출판 깊은 샘 대표] 역사적 진실은 권력의 입맛에 맞게 왜곡(歪曲)되고 묻히고 가공(加工)된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통해 삼국의 역사를 신라에 맞추어 가공하였다. 신라가 중심이 되고 백제와 고구려는 변방으로 밀려났다. 멀리 볼 것도 없다. 지금도 역사를 왜곡하고 뒤틀려는 새로운 시도를 보곤 한다. 
 
백제는 BC18년 온조가 건국한 이래 위례성(서울)에 도읍을 정하고 AD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위례성까지 493년을 유지해왔다. 지금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은 백제의 도읍지 성곽이다. 따라서 서울은 조선과 대한민국의 600년 도읍지가 아니고 1100년의 장구한 세월 수도이기도 하다.

이후 백제는 웅진시대 64년과 사비시대 123년을 지나 AD 660년 의자왕이 중국으로 끌려가면서 678년 백제는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오늘은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사비(부여)를 걷는다.

아침부터 사람들의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진다. 아마도 백제의 마지막이 떠올라 더 그렇게 느껴진 내 마음 탓이리라.

▲ 오천 결사대 충혼탑. /사진=박성기 대표

길을 잘못 접어든 버스는 공주(웅진)를 돌아 부여(사비)로 갔다. 공주에서 부여는 불과 20여 km 길이다. 그 길 위로 명멸했던 백제 사람들의 지나가는 모습과 떠드는 모습, 계백의 5000결사대가 황산벌을 향해 출정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지나갔다.

버스는 공주의 공산성과 무령왕릉, 수촌리 고분군을 지난다. 마음은 내려서 웅진백제를 돌아보고 싶으나 나중을 기약하고 사비로 계속 나아갔다. 그렇게 버스는 한동안 백제 옛길을 끼고 내달렸다.

▲ 능산리 고분군. /사진=박성기 대표

노정(路程)의 출발지 부여 능산리 고분이다. 백제의 고분은 이미 도굴꾼들에 의해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슬픈 현실을 목도할 뿐이다. 서서히 기지개를 켜듯 백제의 이곳저곳이 복구에 힘을 쏟고 있다.

▲ 복원 중인 청마산성. /사진=박성기 대표

고분을 끼고 복원중인 청마산성(靑馬山城) 성위를 타고 길을 텄다. 중간 중간에 성곽 복원에 쓰일 발굴된 돌과 새 돌이 쌓여있다. 성벽은 고대와 현대가 어우러져 옛 돌과 새 돌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되어 복원되어 가고 있다. 경제적인 부담이 되더라도, 그리고 늦더라도 완벽한 형태의 복원이 되기를 기원하며 산을 넘었다. 꽃으로 단장된 길은 백제 순례자의 어깨에 잎을 뿌리며 반기고 있다.

▲ 금정산에서 바라본 정림사지. /사진=박성기 대표

금성산을 넘어가니 확 트인 부여(사비)다. 산 아래 정림사지 5층석탑이 눈에 늘어온다. 읍내의 집들은 촘촘하니 가득하다. 그 뒤로 부여(사비)를 휘둘러 감싸 안은 백마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무뢰한 당나라 장수 소정방과 김유신의 연합군에 마지막까지 항전했던 백제인을 백마강은 지켜봤을 터이다.

▲ 정림사지5층석탑. /사진=박성기 대표

정림사지 5층석탑이다. 지금껏 보아왔던 어떤 탑들도 이 석탑의 뒤다. 세련되고 격조 높은 기품을 보여주는 탑을 보는 순간 압도되었다. 모든 탑의 가장 앞자리에 두어도 될 최고의 석탑이다.

백제의 마지막을 지켜봤을 탑엔 소정방의 업적을 기록한 글귀가 역사 뒤편으로 사라진 백제의 쓸쓸함을 더할 뿐이다.

나는 탑 주위를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의자왕도, 계백도, 백제 부흥을 주도한 부여 풍도…. 백제의 주인이었던 옛 백제인들이 나와 같이 탑돌이를 한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홀로 탑돌이를 하고 있다.

▲ 부소산성 성문. /사진=박성기 대표

정림사지를 지나 부소산성에 들었다. 성문을 거쳐 부소산 비탈을 올랐다. 발 아래 백마강이 도도하고 강 건너 넓은 들판이 한 눈에 가득하다. 산길 옆 백마강을 굽어보며 따라가다 낙화암 오르는 길에 다다랐다. 길이 가파르다.

▲ 낙화암 위의 백화정. /사진=박성기 대표

낙화암이다. 천길 낭애 가득한 꽃잎이 제 한 몸 떨어져 죽은 전설처럼 사방에 난만하다. 유장한 백마강은 진실을 머금고 흐를 뿐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인가. 의자왕에 덧씌워진 패덕한 군주의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가공의 역사는 아직도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린다. 아마도 나라 잃은 슬픔에 뛰어내렸을 백제인들을 모독하는 일임에 틀림없다. 백제가 승리했다면 의자왕은 만대에 이름이 빛나는 성군이었을 테니까.

▲ 낙화암에서 바라본 백마강. /사진=박성기 대표

낙화암을 지나쳐 내려가니 고란사다. 고란사는 절의 뒤뜰 커다란 바위틈에 희귀한 고란초가 빼곡히 촘촘하게 돋아나 고란사(皐蘭寺)라 부른다. 매일 고란사의 맑은 샘물을 실어 왕궁에 전하였을 만큼 바위틈에서 나오는 물맛이 일품이다. 까마득한 낙화암의 수직을 보노라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아슬아슬 절벽 중간 암벽 틈사이로 피어난 꽃들이 천년의 세월을 말해 주는 듯 고고하다.

▲ 고란사와 낙화암. /사진=박성기 대표

고란사에서 구드래 선착장으로 가는 배를 탔다. 구드래는 백제를 가리키는 옛말로 이곳은 중국과 일본과 교통하는 사비의 중심항구였다. 배는 고란사 앞을 한 바퀴 돈 후 낙화암을 지난다. 관광선 위에서는 이인권의 '꿈꾸는 백마강'이 흘러나와 흥얼거리며 따라 했다. 넘실대는 백마강의 물결 위로 고란사가 마치 표표한 나룻배인 듯하다. 순식간에 구드래 선착장에 도착했다.

▲ 궁남지. /사진=박성기 대표

저녁을 먹은 후 부여의 마지막 목적지인 궁남지로 향했다. 날은 벌써 어두워져 사방이 캄캄하다. 선화공주와 사랑으로 유명한 무왕이 만든 인공호수인 궁남지 주변은 온통 연꽃 천지인데 밤이라 보이지 않고 연못 가운데 포룡정 다리 위에 펼쳐진 야경이 꿈꾸듯 환상적이어서 홀린 듯 두 번이나 돌았다.

백제 사비길 14km를 마쳤다.

이번 노정은 한성백제에서 웅진을 거쳐 사비백제까지 680년의 역사가 되살아나는 길이었다. 또한 백제의 수많은 유물들이 제 있을 곳에 있지 못하고 있지만 한 가지씩 제 자리를 찾는 중요한 시작을 우리가 해야 한다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는 길이기도 했다. 역사의 소중함은 경제적 가치 이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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