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타이지, 대원 옥새를 얻은 후 조선의 추대를 요구하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만필] 청나라의 두 번째 황제인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1635년까지도 황제가 아닌 왕에 머물고 있었다. 앞서 1627년 정묘호란 때 조선과 ‘군신지간’이 아닌 ‘형제지의’에 만족했던 이유 가운데 하나다.

이미 명나라 형세는 홍타이지가 황제를 선포한다고 해도 자신을 쉽게 응징하지 못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는 역사를 보는 안목에서 이전의 ‘오랑캐’ 왕조들과는 격이 달랐다. 무조건 힘만 있다고 황제를 선포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칭제는 다른 나라 백성에게도 임금노릇을 하겠다는 뜻이다. 왕도(王道)가 흔들렸을 때 이를 바로잡을 충분한 힘도 있어야하고, 또 남의 나라 백성이라도 자신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런 자격을 못 갖추고 무조건 황제 즉위식만 한들, 앞선 요나라, 원나라와 같이 단명하는 왕조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1635년 홍타이지가 감격을 할 중대한 일이 벌어졌다. 그의 이복동생 도르곤이 몽고 원정에 나서 원나라 최후의 대칸, 즉 황제인 에제이(額哲)의 항복을 받고 대원의 옥새를 차지했다.

칭기즈칸 이래 세습을 이어가던 몽고 황제의 항복을 받고 그 땅을 평정한 것은 이제 군사적으로 완전히 북방의 천자가 됐음을 의미했다. 원나라 황제들이 쓰던 옥새가 들어온 것은 이를 상징하는 일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를 통해 몽고의 왕들이 대거 홍타이지에게 입조했다. 그를 황제로 받들기로 한 것이다.

홍타이지는 이제 황제가 되기 위한 실력을 충분히 입증했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이 있었다. 제위에 오르는데 마땅한 격식과 절차였다. 무수한 몽고의 왕들을 거느리게 됐지만, 이들 가운데 격식 있게 의식을 치를만한 지식과 예법을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었다.

자연히 눈길은 아직 군신간이 아니라 형제관계를 맺고 있는 조선으로 향했다. 정묘호란 때 봤듯, 저런 한심한 국방력을 가질 정도로 학문을 숭상한다니, 엄숙한 예법을 지키면서 황제가 되는 데는 조선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였다.

이런 의전적 필요가 아니라도, 몽고를 복속시킨 홍타이지의 다음 목표가 조선이 되는 것은 정복 책략에 비춰 봐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야 배후의 걱정없이 명나라와의 대결에 주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홍타이지의 사신이 인조14년인 1636년 2월 의주에 당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청나라 장수 용골대와 마부대가 몽고지역의 대장 47인, 차장 30인을 거느리고 왔다.

용골대는 의주부윤에게 “우리나라가 이미 대원(大元)을 획득했고 또 옥새를 차지했다. 이에 서달(몽고지역)의 여러 왕자들이 대호(大號. 황제 칭호)를 올리기를 원하고 있으므로 귀국과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차인을 보냈다. 그러나 이들만 보낼 수 없어서 우리들도 함께 온 것이다”고 말했다.

홍타이지 본인은 아직 생각이 없는데 새로 귀순한 몽고 왕자들이 황제에 오르라는 요청을 조선과 함께 하려고 해서 단지 같이 온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조정은 “신하된 사람들이 다른 나라 임금에게 대등한 예로 글을 보내는 전례가 없다”며 서신의 접수조차 거부했다.

이것이 나중에 남한산성에서 포위됐을 때 홍타이지로부터 질책을 받는 하나의 사유가 된다.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보낸 국서에서 “몽고의 여러 왕자들이 너에게 권유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너는 이를 외면했다. 저들은 모두 요 금 원 황제의 당당한 후손들인데 너보다 못한 것이 무엇이냐”고 꾸짖었다.

만약 이 때 인조가 홍타이지 추대에 동의했다면, 조선은 커다란 전란의 피해없이 새로운 동아시아 질서에 적응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조반정 당시 인목대비의 교서에 나타난 인조 정권의 이념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 사회 특유의 여론구조에서는 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용골대 일행은 조선이 국서 접수를 거부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가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선과 홍타이지는 정묘호란 때의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외교 상태를 그대로 유지했다. 홍타이지는 그 후 국호를 청으로 고쳐 칭제를 시작했다.

마침내 그해 12월,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으로 쳐들어와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포위했다.
 

▲ 인조가 병자호란 때 농성을 마치고 항복을 위해 출성했던 남한산성 서문. /사진=뉴시스.


대원의 옥새를 찾아 이복형 홍타이지의 즉위에 결정적 역할을 한 도르곤은 병자호란에서도 몽고 30년 침략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강화도를 함락시켰다. 도르곤에 의해 봉림대군 일행이 청나라 포로가 됐다. 조선으로서는 마지막 의지할 곳도 없어졌다.

양대 호란 동안 이렇다 할 군사력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조선이지만 비상시기를 맞아 외교관들은 빛나는 활약을 했다.

최명길, 홍서봉과 같은 외교핵심들을 가장 괴롭힌 것은 국제정세에는 전혀 무지하면서 “어찌 오랑캐와 화친할 수 있는가”라는 명분만 고집한 조정대신들이다.

일부 대신이 청나라에 국서 보내는 것에 대해 일부 표현의 문제를 들어 하루 더 늦출 것을 고집하다가 마침내 최명길은 “그대들이 매번 조그마한 곡절을 다투고 분변하느라 이렇게 위태로운 치욕을 맞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어찌 오늘날과 같은 상황이 되었겠는가”라며 폭발하고 말았다.

조선과 청나라가 화의 협상을 벌일 때도 청나라 용골대가 예법을 크게 의식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조선의 협상자인 홍서봉에게 “그대 나라가 명나라의 칙서를 받을 때의 의례(儀例)는 어떠하였소?”라고 물은 후 홍서봉의 설명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

이에 따라 인조가 항복하는 절차는 손발을 묶거나 웃통을 벗는 등의 비참한 형식을 피했다. 다만 용골대는 인조가 용포를 입고 나오는 것만은 완강하게 거부했다.

용포 착용 타진은 최악의 항복절차를 면한 홍서봉이 협상 과정에서 국가의 체면을 위해 한 발짝 더 내디뎌 본 것이었다.

청나라 군이 돌아가는 날, 인조는 대원 국새를 차지해 홍타이지의 조선 원정을 앞당긴 장본인 도르곤과 대화를 나눴다. 청나라에 볼모로 가게 된 아들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걱정이었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지금 따라가니 대왕의 가르침을 바랍니다.”

여기서 대왕은 예친왕의 직위를 가진 도르곤을 말한다.

도르곤은 “세자 연세가 이미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니 제가 가르칠 바가 아닙니다. 황제께서 후히 대하시니 염려하지 마십시오. 세자가 가더라도 틀림없이 멀지 않아 돌아올 것입니다”라는 간곡한 위로의 말을 남긴 것으로 조선왕조실록은 전하고 있다.

조선의 항복도 받아낸 홍타이지가 명나라를 누르고 북경의 자금성 어좌에 앉는 것은 이제 시간 문제로 보였다. 그러나 천명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인조의 항복을 받아내고 6년이 지난 1643년, 홍타이지는 갑작스런 뇌혈관 질환으로 숨지고 말았다. 그의 나이 51세였다. 후계 구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할 틈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기세가 한참 뻗어가던 청나라의 국운이 흔들리는 위기였다. 하지만 이 공백을 훌륭히 메운 것이 도르곤이다. 홍타이지의 9번째 아들 복림이 5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도르곤이 섭정왕의 대임을 맡았다.

다음해 명나라는 이자성의 반란으로 숭정제가 자살하고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도르곤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북경으로 진군해 마침내 누르하치, 홍타이지가 꿈꾸던 제국을 세우는데 성공했다.

청나라 군대는 이 때도 북경을 약탈하러 온 침략군이 아니라, 도적 이자성으로 인해 승하한 숭정황제의 한을 풀어준다는 명분으로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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