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20주년 앞둔 한국경제-3>...무엇이 한국 위기(IMF 위기) 초래했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흔히 ‘IMF 위기’라고 부르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지 20년이 되도록 아직 총체적인 원인조차 제대로 분석되지 않고 있다.

위기발생 10년째가 되던 2007년, 당시 일하던 매체에서 나름대로 외환위기 원인들을 정리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이 기사가 포털의 뉴스에도 편집이 돼 상당한 독자들의 반응을 받은 적이 있다. 해당 매체의 서버가 이제 존재하지 않아 기사를 개인블로그에 옮겨 놓았다. (당시 기사: http://blog.naver.com/sixyellow/50046883286)

과분한 격려를 받은 기사였지만, 1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읽어보면 매우 큰 결함을 가지고 있다.

이 기사는 재벌에 대한 위험한 대출을 아무 거리낌 없이 해 온 한국의 오랜 금융관행, 1996년의 종금사 난립과 사상최대 무역적자, 1997년 외환정책의 어리석은 만용 등을 지적했다. 이들 요인 역시 외환위기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긴 하지만, 이는 모두 내부의 요인들이었다.

외부의 요인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가 불러일으킨 전 세계적인 자금의 역류다.

이 점을 올해 처음으로 심도 있게 지적한 사람은 박종규 청와대 재정기획관이다. 박종규 기획관은 청와대에 합류하기 전 금융연구원에서 근무하던 지난 3월, 금융브리프 금주의 논단을 통해 1994년 Fed가 연속 금리인상을 통해 연방기금금리를 3%에서 6%로 올린 후 국제 투자자금이 신흥시장에서 이탈해 미국으로 역류하는 현상이 벌어졌다고 지적했다. 이는 1996년 한국 외환시장에서 원화환율의 급등을 초래했고, 1997년 외환위기로 이어졌다. (본지 관련기사: 연준의 본심을 17개월 전에 이미 파악한 한국의 전문가)

특히 이 점은 올해 한국 경제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 Fed는 지난 2009년 이후의 제로금리와 양적완화 등 부양정책에서 탈피해 3년째 통화긴축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2015년과 2016년 말 한 차례씩 금리를 0.25%포인트 인상한데 이어 올해는 3월과 6월 두 차례 인상했다. 또한 연말까지 한 차례 더 올릴 가능성이 현재 93%에 이르고 있다.

▲ 재닛 옐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이사회 의장이 지난 6월 금리를 인상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Fed 홈페이지 생중계 화면캡처

1994년 1년 동안 3%에서 6%로 올린 것에 비하면 현재 Fed의 금리 인상은 외형적으로 속도가 느린 편이다. 그러나 비율로 보면 1994년은 두 배로 올린 것에 불과하지만, 현재는 출발점이 제로금리여서 비율 자체를 구할 수가 없다. 만약 올해 Fed가 연말 또 다시 0.25%포인트 인상해 연방기금금리가 1.25%가 되면, 1년 전에 비해 2.5배, 2년 전에 비해 5배가 된다.

박종규 박사의 지난 3월 전망은 궁극적으로 Fed가 3.25%까지 금리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는데, Fed의 핵심인사 중 하나인 존 윌리엄스 샌프란시스코 Fed 총재 역시 지난 6월 서울을 방문해 비슷한 전망을 내놓았다. 금리가 3%에 약간 못 미치는 수준까지 Fed는 금리 인상을 지속한다는 것이다.

당장 올해부터 한국 금융시장은 미국과의 내외금리차 역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이미 채권시장에서는 몇 차례 외국인들이 대규모 채권을 팔아치우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 미국의 연말 추가금리 인상 전망이 높아진 시기였다.

20년 전 상황을 거울삼아, 국제투자자금의 역류 가능성을 소홀히 넘기지 말고 적극 대응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점이 있다.

만약 1994년 Fed의 연속 금리인상이 없었다면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가 없었겠느냐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리가 항상 IMF 위기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걸림돌이 되고 있다. 당시 위기를 초래한 많은 당사자들이 자신과 결부된 요인에 대해서 “그것 아니더라도 위기가 올 수밖에 없었다”는 발뺌의 논리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IMF위기와 국제투자자금 역류의 관계를 강조하다보면, 국내에서 무분별하고 석연찮은 정책을 했던 사람들이 이것을 자신들의 변명거리로 삼는다.

그렇다면, Fed의 금리 인상이 없었을 경우, 무분별한 30개 종금사의 무더기 승인이나, 한국 은행들의 ‘대마불사’식 재벌대출을 지속하고도 과연 한국이 위기를 경험하지 않았을까.

지난 20년, 구조조정으로 뼈와 살을 깎아온 지금의 관점에서는 입 밖에 꺼낼 수도 없는 한심한 발상이다.

Fed의 1994년 금리인상이 없었다면, 외환위기는 1997년보다 다소 늦춰졌을 수는 있다. 그러나 위기를 늦추더라도, 한국의 금융체계에는 부실이 더욱 막심하게 누적됐을 것이다.

부실이 더욱 누적돼 위기가 터졌다면, 그 파괴력은 1997년 한국이 실제로 경험한 것보다 더 컸을 것이다.

금융인이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짓들이 ‘세계화 금융’이란 허황된 이름아래 벌어지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에서 빌려온 돈으로 동남아시아의 신용도 낮은 채권을 사들였다. 빌려온 돈의 만기는 3개월짜리인데 빌려주는 돈은 1년, 2년 단위로 나갔다.

갑자기 외환영업을 하는 종금사가 난립한데서 비롯된 현상이었다. 1996년 한 해 동안 20여개 투금사가 종금사로 신규 전환돼 종금사가 30여개에 이르렀다. 이런 정책 결정의 진상이 무엇인지 현재까지도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외환영업은 허가받았지만, 어느 날 일시에 무더기로 나타난 한국의 종금사들이 국제 자금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받을 리가 없었다. 외화를 직접 구해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이 쓴 방식은 신용도가 높은 시중은행이 외화를 대신 빌려오는 것이었다.

시중은행의 외화자금 결제라인의 고위층을 열심히 찾아다녀, 종금사가 1년씩, 2년씩 운용하는 자금을 위해 은행이 3개월 단위로 계속 빌려주도록 로비를 하는 것이 종금사의 필수 업무였다.

하지만 국제 금융시장이 보는 한국 전체의 외화자금 필요량에 비춰볼 때 갑자기 한국의 은행들이 돈을 대거 빌리는 것이 수상했다. 마침내 해외 금융기관들은 한국 은행들에게 이 자금이 은행을 거쳐 종금사로 가는 것이 분명하니 예전의 낮은 금리가 아니라, 종금사 신용도에 해당하는 높은 금리로 가져가라고 단속할 지경에 이르렀다.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전에도 은행과 종금사를 둘러싼 형편이 이랬다.

지금은 은행들이 아무리 유명한 대기업이라도 대출에 대해 정해진 대출심사를 거치고 있다. 하지만, 외환위기 직전의 한국 경제에서 재벌에 대한 대출심사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오히려 재벌이 필요 없다는 돈을 반강제적으로 떠맡기는 풍토도 있었다.

모 재벌 계열사가 은행대출을 중도상환하려고 하자, 은행의 부부장이 이 계열사의 자금담당 임원에게 전화로 “당신들이 오늘날 누구 덕택에 재벌로 성장했는데 이렇게 배신을 하냐? 중도상환할거면 당신네 그룹 전체 대출금을 상환하라”고 호통을 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던 시절이다.

이런 모든 문제들이 겹쳐, 한국은 1997년 11월22일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에 이르렀다.

IMF를 초래한 다양한 한국 내부의 요인들에는 근본적 공통점이 하나 있다. 국가적으로나 개별 기업적으로 원칙을 지키는 안전장치가 무너져있었다는 것이다. 좋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알만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현직을 지키면서 원칙을 깨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도덕적해이다.

이런 부조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쓸데없이 말대꾸하지 말라”는 전통사회 규율에 묶여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선택 가능한 것은 조직을 떠나든지, 아예 한국의 제도와 무관한 외국기관으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전자는 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세대의 간부진으로 성장(?)해 있었고, 후자 가운데 일부는 헐값에 넘어가는 한국기업들을 거둬들이는 ‘점령군’의 악역으로 귀환했다.

한국의 직장문화에서 나이 많은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이 있던 자리에는 적대적 경멸감이 파고들었다. IMF 위기가 한국사회에 남겨놓은 또 하나의 커다란 상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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