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재부 후배 수출입은행장에 '웃지 말고 짧게 대답' 메모에 담긴 사연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국회에서는 가끔 의원들이 주고받는 쪽지가 사진기자들에게 촬영이 돼 뉴스거리가 된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24일 수출입은행에 대한 국정감사에서도 쪽지 한 장이 사진기자에게 포착됐다.

뉴시스의 이날 보도에 따르면, 김광림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이 국감 도중 은성수 수출입은행장에게 “웃지 말고 묻는 말에 짧게 대답하라”는 메모를 보낸 것이 사진기자에게 포착됐다.

‘야당 의원의 갑질’이란 오해의 소지를 담고 있는 이 메모는 사실 김 의원의 관료시절 국회 출석의 생생한 경험, 그리고 ‘각별히 아끼는 후배에 대한 노심초사’가 담겼다.

행정고시 27회인 은성수 행장이 관료경력에서 약진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2005년 대통령비서실로 파견을 간 이후다. 이후 그는 국제금융정책국장, 국제업무관리관을 지내고 한국투자공사(KIC) 사장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가 기획재정부에서 눈에 띄지 않는 세월을 보내다 청와대 파견을 간 것은 당시 차관인 김광림 의원(행정고시 14회)의 배려 때문으로 알려졌다.

김 의원은 13년 전, 재정경제부(지금의 기획재정부)에서 차관을 지내는 동안 유난히 장관 대신 국회에 출석한 경험이 많다. 당시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대외적 일정이 많아 차관이 대신 참석하게 됐다. 장관 없이 차관이 왔다고 해서 중요 결정을 미룬 것도 아니다. 재경부가 사모펀드 법과 연기금 주식투자 등 주식시장 관련법을 집중적으로 통과시키던 시절이어서 장관 대신 김광림 차관 참석으로 법이 상임위원회를 통과한 날도 있다.

특이한 것은 당시 야당 소속인 상임위원장이 이헌재 부총리에 대해서는 많은 배려를 하면서도 차관이 대신 참석한 날에는 무섭게 돌변했다는 점이다. 이 때 재정경제위원장은 당시 3선이었던 김무성 한나라당 의원(현재 바른정당 국회의원)이다.

김무성 위원장은 이 부총리에게는 “일어서서 보고하지 않으셔도 된다” “부총리가 꼭 안 오셔도 되고 차관이 출석해도 된다”며 많은 배려를 했다.

그러나 정작 김광림 차관이 참석한 날은 사람이 돌변해 “차관은 왜 자꾸 검토하겠다는 말만 해요?” “그런 식이면 이 법 통과 안 시킵니다”는 엄포도 자주 놓았다.

차관은 장관보다도 더욱 국회의원들을 자극하지 않도록 극도로 주의를 해야 하는 가운데 법안도 통과시켜야 하니, 김 차관의 부담은 더욱 가중됐다.
 

▲ 김광림 자유한국당 국회의원. /사진=뉴시스.


김무성 의원과 김광림 차관은 김영삼 정부에서 함께 청와대 근무를 한 인연이 있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 때는 김광림 차관을 안동 국회의원 선거에 ‘징발출마’시킨다는 얘기가 정치권에 나돌았다. 이것이 차관에게만 깐깐한 야당 위원장을 만든 배경으로 해석됐다. 김광림 차관은 결과적으로 차관으로 임기를 마친 후 무소속으로 고향에서 출마해 당선되고 나중에 한나라당에 합류했다.

부총리 대신 국회 출석하는 날이면 차관은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넘기는지’에 대한 시름이 깊어졌다. 어느 날, 그는 회의 시작 전 상임위 유리창 밖을 내다보며 나지막하게 부하직원들에게 심정을 토로하는 것을 기자가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저 자리 누가 앉고 싶은 사람 없나?”

놀랍게도 김광림 차관의 이 소원은 그해 연말 실현됐다. 2004년 연말, 1차 종합부동산세가 처리되던 상임위 회의에서다.

이헌재 부총리뿐만 아니라 이종규 당시 세제실장이 증언대에 자주 나섰다. 부총리가 출석하면 특별히 발언할 일이 없던 김 차관은 장시간 상임위 회의만 지켜보고 있었다. 지루한 시간을 탓할 일이 절대 아니었다. 만약 이 날도 부총리가 오지 안았다면 이 살벌한 논쟁을 자신이 다 뒤집어쓸 판이었다. 이날 회의는 강남구청장도 출석해 많은 불만을 피력하는 가운데 점잖은 모습만 보이던 재무관료 선배 김진표 열린우리당 국회의원까지 언성을 높일 정도로 뜨거웠다.

김광림 차관이 다른 용무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세제실장이 다시 증언석에 서자 김무성 위원장은 “실장이 거기 차관자리에 앉아서 계속 답변을 해요”라고 지시했다.

회의장으로 돌아온 차관은 자기 자리에 세제실장이 앉은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주저 없이 바로 뒷줄 재경부 간부들 속으로 파고들었다. 회의가 끝날 때까지 김광림 차관은 여태 국회 출석한 가운데 본적 없는 집을 찾아온 듯 한 편안한 표정을 지은 채 앉아있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차관의 이런 편한 모습을 볼 수 없는 세제실장의 심정은 전혀 별개였다.

회의가 끝난 후 기자가 이종규 실장에게 “‘1일 차관’이 돼 보신 심정이 어땠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조건반사적으로 “좌불안석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광림 의원이 관료시절 겪었던 국회 출석에 대한 ‘산전수전 공중전’의 모든 경험은 세월이 흘러 ‘웃지 말고...’라는 메모 한 장에 담겼다. 행여 자신이 보는 앞에서 아끼는 후배가 긴장부족으로 고슴도치 신세가 되지 말라는 염려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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