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출문제집 '족보'만 출제하는 교수... 학위는 어떻게 받았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최근 인도의 명문교육기관인 인도통계연구소의 시험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무작위로 자판을 두들겨 ‘COVFEFE’라는 메시지를 보낼 때까지의 기대시간은 얼마인가”라는 문제가 출제됐다. COVFEFE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해 언론에 대해 불평하는 트윗에 포함한 문구다.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로서는 최근의 시사상황을 응용한 문제가 통계학 시험에 등장하니 대단히 어렵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사실 확률과정론에 단골로 등장하는 ‘족보’급 문제다. 원래는 ‘원숭이가 타자기를 두들겨 ‘ABRACADABRA’라는 메시지를 만들 때까지의 기대시간은 얼마인가’라는 문제를 바꾼 것이다.

이에 대한 확률과정론적 해법은 신인석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이 잘 알고 있다. 경제학과 출신인 신 위원은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유학할 때 통계학과 박사과정급인 이 과목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여줬다. 과목을 담당한 라이체룽 교수는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강의한 적이 있다.

인도통계연구소의 ‘COVFEFE’는 웬만한 수강생이라면 풀어봤을 ‘ABRACADABRA’ 문제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담당교수는 학생들이 기본적인 점수는 확보하라는 차원에서 이 문제를 출제했는지도 모른다.

시험에 출제될 것이 뻔한 문제를 ‘족보’라고 한다. 이것이 요즘 대학가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다.

이른바 ‘족보’를 가진 학생은 한 학기 내내 공부를 안하고도 A를 받는데, 공부를 열심히 하고 ‘정정당당히’ 족보를 멀리 한 학생은 B를 받는다는 것이다.

단 한마디로 시비를 가린다면, 이것은 담당교수의 자질 문제다.

학기마다 똑같은 시험문제를 내놓으니, 학생들은 앵무새 같은 답만 작성하고도 A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불성실하게 시험문제를 내는 교수는 강의를 맡을 자격이 없으니 일체 과목을 맡기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대학의 교과목은 훌륭한 강의와 함께 정당한 평가시스템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족보’가 통하는 과목은 평가시스템이 엉망인 것이다.
 

▲ 기말고사 준비에 몰두하고 있는 대학생들. /사진=뉴시스.


수학이나 공학 분야 외국의 유명한 교수들 저서에는 수많은 연습문제들이 등장한다. 한 분야의 서적이 수없이 많은데도 똑같은 연습문제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남의 저서에 있는 연습문제를 그대로 베끼는 것도 표절이기 때문이다.

그럼 이 많은 연습문제를 교수들은 어떻게 만드는 것일까. 상당부분은 자신이 지금껏 출제해 온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문제들이다. 저서에 들어간 문제는 앞으로 자신이 맡은 과목의 시험에 그대로 출제하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된다. 약간 변형해서 활용할 수는 있다.

평생 강의를 해 오면서 매학기 시험문제를 만드는 것도 상당한 노력이 드는 것이다. 이것을 모으기만 해도 훌륭한 책 한권을 쓸 수 있다.

나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 시험문제가 훗날 후배들을 가르치는 연습문제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면 매우 감회가 새로울 것이다.

그런데 사회과학 분야에 오면 조금 상황이 달라진다.

예를 들어, 고전 사회학이론 과목 같으면 족보가 없을 수가 없다. 이것은 선배한테 얻어야만 가능한 것도 아니다. 이 과목 수강생이면 강의 첫날부터 중간고사에 나올 문제가 칼 마르크스 아니면 탈콧 파슨즈 정도 인 것을 누구나 다 알게 된다.

출제될 문제는 두 개 가운데 하나인 것을 다 알지만, 답지를 쓰는 데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왜냐하면 문제가 ‘칼 마르크스 이론을 논하라’ 또는 ‘탈콧 파슨즈를 논하라’와 같은 형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두 개를 다 공부하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이런 과목의 핵심은 논지를 어떻게 훌륭하게 전개하느냐다. 대개 학생은 교수의 성향에 따라 누가 더 출제 가능성이 높은가를 따져 그 쪽에 좀더 몰입하게 마련이다.

독일에서 공부를 한 어떤 교수는 평소 강의 때부터 미국 학자들의 지나친 개량적 접근을 비판해 왔다. 교수가 이렇게 자신의 성향을 드러냈는데도 파슨즈에 80%의 비중을 두고 공부를 했다가 학점이 B에 그친 적이 있다. 그래도 20%의 정성으로 공부한 마르크스 얘기를 써서 그 정도 받은 것이다. 만약 100% 파슨즈 공부만 해서 답지를 문제와 무관하게 그걸로 채웠다면 아마 1980년대 정서에 D를 받았을 것이다.

이런 경우는 ‘족보도 약간은 실력’이란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요즘은 대학생들의 학점 경쟁이 너무 치열해서 B를 ‘그럭저럭 잘 한’ 정도가 아니라 ‘매우 아쉬운’ 학점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교수의 소신에 찬 평가 여지도 줄어들어 절대평가가 아닌 상대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대학의 자유로운 학문 연구와는 거리가 먼 세태이긴 한데, 해법을 찾기 어려우니 오늘날 학생들에 대해 예전의 낭만적 시절 선배들이 함부로 조언을 해주기 어렵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했어도 대학과 고등학교 공부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과목의 핵심내용부터 학생 스스로 찾아가야 한다는 점이다.

만약 남달리 많은 시간을 들여 공부를 했는데도 전부 ‘족보’에 들어갈 만한 내용을 피해서 공부를 한 것이라면, 이것은 이 과목에 관한한 학생의 소질이 아직 부족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족보는 과목의 핵심 내용을 뜻하는 것이지, ‘기출문제집’을 얘기하는 게 아니다.

기출문제집이란 소리가 나올 정도로 ‘족보’ 기말고사를 출제하는 교수는 학위부터 어떻게 받아온 것인지 의심을 받아 마땅하다.

고등학교 3년 내내 치열한 입시경쟁을 거쳐, 부모님이 내주시는 막대한 등록금을 내고 들어온 학생들이다. 이런 학생들을 족보교수에게 맡기는 것은 대학의 도덕적 직무유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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