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환율, 1050원대 들자마자 대규모 달러매수 등장으로 급반등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1980년대의 한가운데를 지나간 84학번이면서도 1987년의 역사적 현장을 제대로 경험하지는 못했다.

한국사회를 크게 바꾼 1987년 ‘6.10 항쟁’을 이틀 앞둔 6월8일 군에 입대했다. 3학년까지 마치고 휴학을 하고 있었다.

훈련 첫 주차 목요일에 예정됐던 야간사격 훈련이 취소되면서 확실히 시내에 큰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입대하기 전에는, 마땅히 만날 친구도 별로 없었다. 군대 갈 계획이 없는 친구들은 졸업반으로 대학원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 때는 석사장교 제도가 있어서 병역해결 수단도 되는 대학원 입시가 더욱 치열했다.

친구들이 모두 공부한다고 바쁘니, 할 일 없는 휴학생은 학교 근처에 가서 하루하루를 소일하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다.

학생운동이 격렬했던 학교 중의 하나였지만, 5공화국 때라고 해서 학교에서 매일 시위가 벌어졌던 것은 아니다. 1986년까지는 1~2주일에 한 번 정도의 빈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1987년 5월이 돼서는 거의 매일 최루탄과 돌, 화염병이 교차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비오는 날도 별로 없었고, 점점 무더워지려는 날씨에 매일같이 교문에서 쫓고 쫓기는 학생과 경찰의 모습은 ‘끝이 안 보인다’는 답답함을 이어가고 있었다.

대치가 한 시간 쯤 진행됐을 때, 경찰 쪽에서 다탄두탄 발사 차량이 전진해 왔다. 이제 시간도 됐으니 오늘의 시위대를 해산시킬 결정타를 날릴 작정이었다. 이 때 진압경찰의 측면으로 한 학생이 빠르게 접근했다. 그가 던진 화염병이 정확하게 차량에 명중하면서 화염이 크게 치솟았다.

시위에 참여는 하지 않고 지켜만 보던 뒷줄의 학생들 사이에서 조건반사적인 박수갈채가 터졌다. 당시의 KBS 뉴스에서 언제나 ‘과격시위를 거부하고 면학에 몰두하는 대다수 학생들’이 터뜨린 갈채였다.

혹자는 이런 폭력적인 시위에 환호한다고 비난을 할 수도 있지만, 이 갈채는 ‘끝이 안 보이는’ 시대 상황으로 인한 갈증이 빚어낸 것이다.

이 갈증을 빚은 상황은 요즘 상영 중인 영화 ‘1987’이 잘 보여주고 있다.

뜻밖의 일격을 받은 경찰들은 허둥대면서 얼른 발사차량을 에워쌌다. 호위를 받은 발사차량은 이번에는 착오 없이 일명 ‘지랄탄’으로 불리던 다탄두탄을 발사했다. 대학교 가운데 크지 않은 편인 교정은 곧 전체가 가득한 연기 속에 파묻히고 이것으로 그날의 시위는 종료됐다.

1987년은 그날의 해산이 내일 또 다른 집회의 약속을 겸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인 6월29일, ‘6.29 선언’으로 인해 5공화국 폭압 통치는 사실상 백기투항했다.
 

▲ 1987년 6.10 항쟁에 동참한 김영삼 전 대통령(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 경찰에 의해 연행되는 모습. /사진=뉴시스.


9년 세월이 지난 1996년, 은행에서 보고 있는 환율변동 그래프는 비록 단순도표에 불과했지만 1987년 학교에서 구경한 시위 장면을 저절로 연상시켰다. 나는 실제로 당시 외환일보를 시위상황에 빗대서 쓰곤 했다.

수천만 달러 규모로 시장개입이 나올 때마다 올라가던 환율곡선이 아래로 움찔하는 건 최루탄이 터지자 선두에 섰던 학생들이 흩어지는 형상이었다. 이걸로 성이 차지않아 1억 달러 ‘다탄두탄’급 개입이 나왔을 때는 그동안 깔려있던 모든 달러매수 주문을 깔아뭉개면서 환율이 5원, 10원씩 팍팍 내려갔다. 분위기 완전 장악의 목적을 가진 이런 대규모 개입은 시위대를 결정적으로 해산시키는 ‘지랄탄’ 역할이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환율은 다시 슬금슬금 올라가기 시작했다.

1996년은 지금하고는 외환시장 상황이 반대였다. 지금은 환율이 너무 떨어져서 걱정이지만, 그때는 너무 올라가는 것이 문제였다. 1997년 외환위기의 예고를 하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경상수지 적자, 점점 높아지는 미국 금리, 갈수록 드러나는 한국의 기업 부실 등 환율이 올라갈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당국자들은 이걸 하나도 인정하지 않고 “무분별한 투기세력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9년 전, 위정자들이 국민들의 시대적 요구를 “일부 과격세력의 선동”이라고 매도하던 것의 외환시장 축소판이었다.

당국자들의 기개는 절대 대세를 이길 수 없다. 그 교훈은 1997년 ‘IMF 위기’가 보여주고 있다. 끝내 외환보유액이 바닥나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말았다.

서울 외환시장에서 8일 당국이 모처럼 힘을 썼다. 주요 외신인 블룸버그가 전면 주요기사로 전할 정도로 국제 금융계의 눈길을 끌었다.

이날도 개장 후에는 원화환율 하락세가 지속돼 1050원대로 내려가자 마침내 ‘큰 손’의 공권(公券)력이 발동된 모양이다. 순식간에 10원 가까이 올라갔다니, 1996년과 비교했을 때 방향만 반대일 뿐 분위기는 흡사하다.

당국의 경고가 제대로 먹혔는지, 원화환율은 마감을 한 시간 앞둔 현재까지 전날보다 0.5% 상승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외환시장에서 당국이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비결은 ‘절제’에 있다. 한동안 좀체 보기 어려웠던 개입이 발동되면서 이날의 분위기를 확실히 장악했다. 무분별하게 흐름에 편승하려던 딜러들에게는 상당한 경고가 됐을 법하다.

하지만, 개입의 힘은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면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외환시장의 모든 딜러들이 갖고 있는 역사적 경험이다.

환율을 올리고 내리는 것은 역시 수급의 원칙이다. 만약 일부 투기세력들의 교란이 먹혀들고 있다면, 그것은 투기꾼들이 수급원칙에 따른 정확한 방향으로 투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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