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대통령'을 자처하는 정치인은 결과를 보장해야

[초이스경제 장경순 경제칼럼] 한때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법적인 판단보다 국민적 여론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부정을 저질렀더라도, 국민들은 그보다 훨씬 더 잘 살게 됐다면 법적 심판과 별개로 그를 동정하는 여론이 앞설 것이다. 여론이 이렇다면 사법당국도 법의 심판을 들이대기가 대단히 부담스러워진다. 국가경제가 임기 5년 동안 가구당 재산이 1억 원씩 늘었다면 1000만 가구의 재산은 1000조 원 증가한 것이 된다.

이런 어마어마한 업적을 남긴 대통령이 재임 중 수백억 원대 부정을 저질렀다면, 아마 그에 대한 동정여론이 상당할 것이다. “지금 대통령은 뭘 얼마나 잘하기에 이런 사람한테 보복을 하느냐”는 반발이 거셀 것이다. “떡고물 만지다보니 손에 묻은 것”이라는 예전 어느 독재자 측근의 발언도 다시 등장할 것이다. 법은 물론 일체의 차별 없이 엄정하게 적용돼야 마땅하지만, 현실은 별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4일 검찰에 출두해 하루 종일 조사를 받고 돌아갔다.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출두했을 때 지지자들이 그를 응원하고 정권에 항의하는 예의 모습은 이번에는 없었다고 한다.
 

▲ 이명박 전 대통령이 15일 새벽 검찰조사를 받고 귀가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2007년 대통령에 당선될 때, 본선보다 더 어려웠던 한나라당 경선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을 물리쳤다. 1950년대 조병옥-장면, 1970년대 김대중-김영삼과 비교할 정도로 치열했던 당내 경선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당원투표에서 뒤졌지만 여론조사에서 앞서 역전승을 거뒀다.

당시 한나라당 관계자에 따르면, 한국 정치에서 좀체 보기 어려웠던 투표현상이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 거주하는 호남연고 유권자 가운데 2세들에게서 이명박 선호현상이 크게 나타났다고 한다. 이는 호남 출신인 민주당 후보와의 본선에서도 이어졌다. 경제중심의 선거 전략이 상당히 적중한 것으로 해석됐다. 본선에서 이 전 대통령은 2위 후보에 무려 530만 표의 격차를 내며 압도적으로 당선됐다.

당선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에 오랜 세월 대못처럼 박혀있던 지역감정이 완화되는 사실에 MB측 캠프는 집권 후까지의 희망을 내다봤던 듯하다.

5년이 지나 이명박 전 대통령이 물러나기 직전인 2012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런 얘기는 쑥 들어갔다. 선거가 다시 보혁대결, 지역대결로 치러진 때문인지 1, 2위 후보 간 격차는 110만 표로 축소됐다.

기업하는 사람들 상당수는 2010년 경기가 참 좋았다고 얘기한다. 한국은행 통계를 봐도 이런 얘기는 확인이 된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2010년 6.5%를 기록했다. 2003년 이후 현재까지 최고다. 2008년 이후는 2010년을 제외하면 3.7%를 넘지 못하고 있다.

MB 5년이 집권3년차인 2010년 같았다면, 그의 오늘날 운명이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하지만 그해 한 해 뿐이었다.

물론, 그의 경제정책은 출발부터 2008년 전 세계 금유위기라는 커다란 짐을 짊어졌다. 관점에 따라, “2%라도 당시엔 나름 선방했다”라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단순한 성장률 숫자가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제가 향후 10년, 20년을 누릴 성장엔진을 남기지 않고 후대의 잠재력을 끌어당겨 깎아먹었다는 비판이 더욱 거세다.

대운하, 삽질경제, 자원외교, 4대강 녹조와 같이 비판세력이 단골로 동원하는 것들을 제외하고 그의 취임 당시로 돌아가 따져볼 것들이 있다.

출발선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던 것들이다. 바로 ‘7% 성장론’과 금융에 대한 무지다.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접어든 시대에 1960~1970년대 고도성장기와 같은 7% 성장은 무리라는 지적이 강했는데도 온갖 건설사업, 그리고 중앙은행의 통화정책까지 모두 고성장에 동원했다. 재임 중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들이 시장에 나가보면 좋겠다”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그가 2010년 임명한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의외로 고집불통 통화정책을 밀어붙여 MB의 집권당 지도부와도 갈등을 형성하곤 했다.

1970년대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인 탓인지, MB의 금융관은 1970년대 수준을 그대로 보여줬다. 금융은 산업의 종속역할을 해야 하므로, 은행원 월급을 낮춰서 종합상사로 이직을 유도하던 것이 1970년대 한국경제다.

산업은행 총재라는 직함에 유독 강한 거부감을 갖고 있던 그가 대통령이 되자, 산업은행 총재는 다른 은행들처럼 행장이 됐다. 그리고 산업은행은 민영화를 한다는 목표로 정책금융공사가 분리됐다.

금융 전체적으로는 산업자본의 은행소유 한도를 4%로 제한하는 금산분리가 완화됐다.

금산분리 완화와 정책금융공사 분리는 모두 그가 퇴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철회됐다. 문재인 정부가 아니라 박근혜 정부에서다.

굳이 행장으로 이름을 바꿨던 산은 총재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기도 전에 KDB 금융그룹 회장으로 명칭이 또 바뀌었다. 오늘날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산업은행의 ‘재벌회장 놀이’가 시작됐다.

이런 정책들은 굳이 결과를 보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현실적, 구조적 문제를 제기했던 것들이다.

많은 비판을 묵살하는데는 간간이 엉뚱한 색깔론도 동원됐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에 대한 반작용에 편승해, ‘반기업적 좌파들의 비판’이라는 반격도 섞여 나왔다.

재벌의 선단식 경영 억제, 지배구조 개선은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 즉 ‘IMF 위기’의 교훈에서 나왔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못한 교훈으로 도입된 개혁정책들인데 엉뚱하게 ‘좌파 정책’이라는 비난을 뒤집어썼다.

경제는 의도보다 결과가 중시되는 영역이다. 결과가 중시되는 곳은 거짓이 통하기 어렵다. 당장은 반대파를 ‘좌파’라고 비난하며 원하는 정책을 펼칠 수 있었겠지만,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결과를 회피할 수는 없었다. 경제정책이란 그런 것이다.

경제체질이 7% 성장커녕, 3% 성장도 힘겨워진 가운데 그가 2013년 1월 퇴임했다. 그의 본심은 취임 때부터 이리 될 줄 알았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든다. 이제 지역감정도 초월할 대통령이란 기대를 받았던 그가 취임 직후부터 벌인 쓸데없는 싸움들 때문이다. 집권자들은 이런 싸움을 벌이면 다른 쪽에 대한 비판적 관심을 줄이고 지지층을 결집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10만원권 발행 계획이 취소된 것은 뒷면 대동여지도의 독도 때문이라고 하지만, 조선시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때문이 아니라 앞면 백범 김구 선생 때문이라는 얘기가 무성했다. 건국절 논란은 문재인 대통령의 1919년 건국절부터가 아니라 MB의 1948년 건국절 주장에서 촉발됐다. 그전에는 임시정부 수립, 정부수립을 특별히 구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008년에 시작된 이 싸움은 지금도 정치권의 단골메뉴로 남아있다.

대통령이 고성장을 시켜주면 사법처리를 면제해주고, 저성장이면 처벌한다는 것도 사실 미개 부족국가에서나 통할 얘기다. 하지만 본인이 먼저 경제대통령을 강조했다면, 출발에서부터 결과에 대한 약정을 안고 들어간 것이다. 경제대통령이란 약속은 절대로 좋은 의도만이 아닌 100% 결과에 대한 확신과 함께 나왔어야 했다. 전세계가 해마다 돌아가면서 개최하는 G20 회담을 올림픽 개최나 되는 것처럼 홍보한다고 경제성장의 결과를 바꾸지는 못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의 지금 모습은 진정한 ‘경제 대통령’을 꿈꾸는 정치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반면교사를 남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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