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모든 재벌이 주력하는 지배구조 개선, LG는 15년 전에 완료

▲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 /사진=LG그룹, 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정치적 진영논리가 극심한 한국에서는 가끔 황당무계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기업의 지주회사 체제를 ‘좌파들의 주장’으로 간주한 것은 그 가운데 하나다.

2000년대 초, 재벌들의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를 단순한 지주회사로 전환해야 한다는 주장은 재벌 친위대를 자처하는 몇몇 논객들에 의해 ‘반 기업적’ 더 나아가 ‘좌파적’ 발상으로 비판받았다.

이 무렵 한국 재벌 총수의 한 주는 보통 주주의 한 주보다 7배 더 큰 의결권을 갖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회사 지분을 종합상사가 갖고, 종합상사 지분은 보험사가, 보험사 지분은 전자회사가 갖는 방식의 순환출자는 총수를 위한 가공자본을 형성했다.

이런 순환출자를 해소하라는 당시 공정거래위원회 요구에 대해 일부 국회의원들까지 나서서 반발했다. 이들 의원들은 “안보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의 소유권 안보를 위해서 지금의 지배구조를 보호해야 한다”고 맞섰다.

일부 종합지를 중심으로 한 언론도 여기에 편승했다. 한 종합지 사설은 “공정거래위원장의 잣대로 보면 한국에도 삼성 LG 현대보다 ‘모범적인’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런 기업은 성장이 둔하고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는 기업”이라고 주장했다.

국회의원이나 사설을 쓴 언론인이나 공통점이 있었다. 전혀 공부를 안한 무지한 상태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그나마 국회의원들은 훗날 부족했던 공부를 새롭게 했음을 입증했다. 기업 소유권 안보를 주장했던 의원들의 주축들은 2012년 대통령 선거 당시 경제민주화를 앞장 서 주장하는 의원들로 돌변했다.

이들은 8년 전, 자신들이 감쌌던 순환출자의 해소를 앞장서 요구했다. 이들이 속한 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신규 순환출자의 금지’만 받아들이자 깊은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언론의 사설은 쓴 사람을 밝히지 않는 것이니, 위에 소개한 사설의 필자가 부족한 공부를 했는지 안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이 사람의 사설이 갖고 있는 커다란 허점은 ‘삼성 LG 현대보다 모범적 지배구조를 가진 기업’이 바로 LG였던 것이다. 구본무 회장이 이끄는 LG는 이미 지주회사를 통한 지배구조를 통해 순환출자를 해소하고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이후 GS, LS 등 굵직한 계열분리를 연이어 할 수 있었던 이유다. 사설 필자는 LG를 삼성 현대와 같은 부류에 넣음으로써 당시 지배구조 개편 논의의 핵심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지금 한국 기업들에게는 해외 펀드인 엘리엇이 가장 신경 쓰이는 공격적 투기세력이다. 이들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한데 이어 지금은 현대자동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또다시 반대하고 있다.

2003년의 소버린은 엘리엇보다도 훨씬 더 큰 위협을 한국 재계에 몰고 왔다. SK그룹의 소유권을 정면 공격했던 것이다. 주주총회에서 실력대결을 해 40%를 넘는 세력을 모을 정도로 아찔한 순간을 연출했다.

소버린은 비록 2005년 SK경영권에 대한 최후 공격에 실패했지만, 이 과정에서 이들은 8000억 원에 달하는 시세차익을 얻었다.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소버린의 다음 행보가 관심의 초점이었다. 곧 이어 소버린이 LG 그룹에 투자한 것으로 밝혀졌다.

소버린의 SK에 대한 투자는 3년에 걸친 요란한 공방전을 가져왔었다. 그러나 LG에 대해서는 투자만 했다는 소식 뿐이었다.

그리고는 몇 달 후, 소버린은 500억원의 투자 손실을 감수하고 LG투자에서 철수했다.

순환출자를 가진 기업은 취약한 계열사 지분 매입을 통해 경영권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이미 주식회사LG 중심의 지주회사 체제를 갖춘 LG에서는 이런 빈 틈을 찾지 못했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서는 이와 같은 구본무 회장과 LG그룹의 행태를 이단으로 바라봤다.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는 정부에 굴복하는 것으로도 해석했다.

진보 정권의 지배구조 개선에 반대했던 다른 재벌들은 이후 보수를 자처하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는 오히려 자발적으로 순환출자 해소에 나서는 이변을 보여줬다.

사소한 이유로는, 지주회사 전환과정에서 주가변동으로 오히려 총수의 지배력이 커진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으로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큰 틀에서 봤을 때, 두고두고 말썽의 소지를 없애는 것이 기업의 백년대계에 유리하다는 자각을 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순환출자구조는 적은 자본으로 많은 회사를 거느릴 수 있는 장점을 가진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바꾸면 적은 자본으로 쉽게 회사를 빼앗길 수 있는 치명적 단점을 가진 것이다.

LG그룹의 지배구조는 마치 프로야구 LG트윈스의 선발투수 로테이션과 1이닝 구원투수 체제와 같은 효과를 가져왔다. 타계한 구본무 감독은 프로야구에 대한 열렬한 관심을 가져 1990년 MBC청룡을 인수해 LG트윈스를 만들었다.

1993년 취임한 이광환 LG트윈스 감독은 한국 야구계에 아직 생소한 메이저리그 식 5인 선발투수 체제와 마무리의 9회 1이닝 투구를 도입했다. 상당수 야구인들이 한국에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했지만, 불과 몇 년 만에 모든 팀이 LG트윈스를 따라했다.

지주회사도 이와 같다. LG가 시작한 지주회사를 지금은 거의 모든 재벌이 순환출자 해소와 지주회사 도입 계획을 세우고 있다.

발 빠른 변화의 모습을 보이는데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다는 지적을 받는 LG지만, 오늘날 한국 재벌들이 안고 있는 취약한 지배구조와 관련해서는 한 발이 아니라 백걸음은 앞선 모습을 남겼다.

고 구본무 회장이 이 나라 재계에 남긴 커다란 발자취다.

로이터는 21일 기사에서 구본무 회장에 대해 “한국의 4번째 재벌을 글로벌 브랜드로 전환시켰다”고 평가했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