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인의의 상징 송양공이 초나라 장왕의 포로로 잡혔다. 초나라는 임금을 인질로 송나라에 가혹한 요구를 해왔다.

 
일찍이 송양공과 함께 서로 임금 자리를 양보해 명망이 높았던 형 목이가 이번에는 두말 안하고 비어있는 임금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초나라 사신에게 “전 임금을 너희가 어찌하든 우리 알 바 아니다”고 전했다.
 
양공을 붙잡아도 별다른 이익이 없게 되자 초나라는 곧 양공을 석방해 송나라로 돌려보냈다. 혹시 형제간 내분이 벌어지면 그 틈을 노리자는 심산도 있었다.
 
양공이 돌아오자 목이는 즉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 동생을 복위시켰다.
 
이 일은 차후 중국 역사에서 임금이 궐위된 난국을 헤쳐 나가는 교본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 여진족의 조선 고발에 대해 "조선은 사대를 잘하는 나라이니 그럴 리 없다"고 일축했던 명나라 정통제(영종)는 그 후 몽고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포로로 잡히는 신세가 됐다.
수많은 세월이 흘러 명나라 정통황제가 몽고 오이라트 원정에 5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갔다. 그러나 물이 없는 곳에 고립돼 마침내 몽고의 포로 신세가 됐다.
 
‘송양공의 교본’에 따라 명나라에서는 황제의 동생이 즉시 제위를 차지했다. 과연 정통제는 별다른 조건 없이 몽고로부터 풀려나 북경에 돌아왔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역사적 교훈과 어긋나게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새 황제인 경태제가 형에게 임금 자리를 돌려줄 생각을 안 한 것이다. 7년 후 경태제가 중병에 걸렸을 때 정통제는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되찾았다.
 
비상시기를 맞아 임금을 대신할 ‘플랜 B’를 미리 확보하는 것은 국가 운영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다. 미국이 굳이 선거를 통해 ‘사상 최대의 한직’인 부통령을 선출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조선을 비롯한 대부분 왕조에서는 장차 보위를 이어갈 저군(儲君. 태자 또는 세자)들에게 미리 제왕 교육을 시켜 ‘플랜 B’를 확보했다.
 
문종의 치세가 비록 2년에 불과하지만 그는 즉위 무렵, 이미 8년의 대리청정 경험을 갖고 있었다. 성군 세종대왕의 병이 깊어지면서 세자에게 정무를 맡긴 것이다. 비록 짧은 재위기간이지만 문종의 치세가 안정적이었던 이유다.
 
플랜B에게 국정을 가르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임금에게 집중되는 상소문들을 미리 열람, 분류하는 것이다. 청나라의 강희황제는 말년에 태자를 폐위하고는 다른 황자를 이 자리에 세우지 않았다. 대신 상서방 임무의 상당 부분을 넷째황자에게 부여해 국정을 보좌하게 하면서 차기의 암시를 백관들에게 전했다.
 
넷째황자는 훗날 부황(父皇)을 계승해 옹정황제가 됐고 치세의 대부분을 밤새워 상소문 읽고 국정 정보를 확보하는데 보냈다. 정치가 안정된 것은 오히려 강희제보다 더 훌륭했다는 옹정의 치세다.
 
▲ 병자호란 후 소현세자를 청으로 압송해간 도르곤. 그는 황제 홍타이치의 이복동생으로 이 시대 가장 유능한 야전사령관이었다. 인조실록에 나타난 그의 풍모는 이미 오랑캐 장수의 수준을 뛰어넘고 있다.
국난의 시기에 임금이 가지 못하는 곳에서 대행을 하는 분조(分朝)도 플랜B들의 중요한 요소다. 비운의 삶을 마감한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뿐만 아니라 인질로 잡혀간 뒤에도 현지에서 분조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청나라 각계와 깊은 신뢰를 쌓아 3년 여 만에 귀향할 수 있었다.
 
부왕의 특사자격 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수행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게 화근이 됐다. 정사보다 야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사코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100% 옳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분명한 것은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들이 죽었는데 미망인이 된 며느리에 대한 가독한 처사로 끝내 처형했다는 점 뿐만 아니라 세 손자를 모두 귀양 보내 그곳에서 죽게 만든 것이 방증이다.
 
세자가 인질로 가는 길 위에서 눈물을 뿌리던 아비가 이토록 잔인해 지리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조실록의 한 부분이다.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 지금 따라가니, 대왕(청 황제의 동생 도르곤)께서 가르쳐 주시기를 바랍니다.”
 
“세자(소현세자)의 연세가 벌써 저보다 많고, 일에 대처하는 것을 보건대 실로 제가 감히 가르칠 입장이 못 됩니다. 더구나 황제께서 후하게 대우하시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략)
 
세자와 대군이 절하며 하직하고 떠나자, 상이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기를 “힘쓰도록 하라. 지나치게 화를 내지도 말고 가볍게 보이지도 말라”하니, 세자가 엎드려 분부를 받았다. 신하들이 옷자락을 당기며 통곡하자, 세자가 만류하며 말하기를 “주상이 여기에 계신데 어찌 감히 이렇게들 하는가.”
 
3년 떠나 있는 자식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건 이상한 보고가 임금의 귀에 들어가면서부터다. 청나라의 심양에서 세자를 모시는 사람들이 ‘윗전’ ‘아랫전’ 하는 임금에게나 쓸 용어로 세자와 세자빈을 지칭한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세자가 모사해 인조를 청으로 불러들이고 세자가 대신 즉위한다는 흉흉한 얘기마저 나왔다. 이러다가 돌아온 세자가 온갖 희귀한 청나라 물건을 나열하자 마침내 부왕은 역정을 내기에 이르렀다.
 
분조의 성공 여부는, 플랜B를 따르는 사람들의 처신이 상당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아직은 엄연히 ‘코드 원’과 ‘플랜 B’의 구분이 존재하는데 어리석은 성급함이 코드 원의 의혹을 부추길 경우 꿈으로 가득 찼던 미래는 실현되지 않는 것이다.
 
국내 재벌 그룹의 오너회장이 일신상 형편으로 경영을 못하게 되면 장자가 일시 대행을 하는 일이 간간이 나타나고 있다. 예전의 고사에 비춰봤을 때, 장자의 측근들에게 더 한층 신중한 처신이 요구되는 때다. 특히 갈수록 상속 자체를 옳지 않게 여기는 시각이 많아지는 시대이니 더 말할 나위 없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