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 가치를 무시하는 언어, 그 나라 경제영역도 축소시킨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월드컵 내내 한 방송국 중계만 보고 있었다. 어제 처음으로 채널을 돌렸다.

때가 되면 기사를 통해 1919년 대한민국 건국을 강조하는 사람으로서, 내 주어진 위치에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는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원칙을 잊지 않고 있다.

그런 내가 듣기에, 몇몇 중계자들의 발언은 대단히 불편했다. 한국인이 지니고 있는 반일감정의 깊은 역사성을 오히려 웃음거리로 만드는 것이라 생각됐다.

이 시간 친구들과 소주 한 잔을 놓고 축구를 보면서 할 수 있는 얘기인 것은 맞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객담들을 공공의 방송화면에 나가서 할 생각도 용기도 전혀 없다.(물론 기회도 없기는 하지만.)

과연 하루가 지나니 일부 언론에서 몇몇 진행자들의 무분별한 발언을 지적하고 있다. 나는 기사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발언들은 듣지 못했다. 이미 채널을 돌린 뒤여서다.

한두 사람의 실수라기보다는, 우리말이 안고 있는 부주의함이 이렇게 쉽게 드러난 사례다.

우리말의 문법이나 어휘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그걸 사용하는 우리의 말 습관이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편협하게 국수적이다. 빈틈도 많다.

싸움으로 비유하면, 운 좋게 한 대만 걸리면 된다라는 ‘무대뽀’ 식으로 주먹을 마구 휘두르는 격이다. 상대는 이런 우리를 차분하게 바라보면서 주먹 하나하나를 피하거나 막다가 결정적 빈틈이 보였을 때 일격을 가하면 우리는 맥없이 나가떨어질 수밖에 없다.
 

▲ 벨기에와 일본의 2일(현지시간) 월드컵 축구경기에서 벨기에가 첫 골을 넣는 장면. /사진=FIFA TV 화면캡쳐.


혹자는 왜 우리가 일본을 싫어하는 것만 트집 잡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한국이 독일을 격파한 다음날 영국의 타블로이드 매체인 더선은 표지부터 큼직하게 독일을 조롱했다. “보비경, 사이코, 크리시 왜들, 가레드, 램프스 그리고 모든 영국 팬들을 위한 소식”이라며 독일이 최하위를 차지한 조별리그 결과와 요아힘 뢰브 독일 감독의 괴로워하는 듯한 사진을 게재했다. 그리고는 절취선 표시와 함께 “잘라뒀다가 기분이 나쁠 때마다 이걸 보면 웃음이 나올 것”이라고 조롱했다.

그러나 일개 타블로이드 매체의 이런 조롱을 공영방송의 2시간 내내 지속된 특정국 비하 중계와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공영방송은 그 나라 언어의 품격을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표현매체다. 한두 진행자의 실수보다는 우리 말 습관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 아니냐는 문제의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단지 일본에 대해서만 험담을 하는 거라면, 역사문제로 인한 불가피성을 참작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와 아무 악연이 없는 국가나 문화에 대해서도 선을 넘는 발언이 너무나 쉽게 튀어나온다.

우리말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요인이다. 우리말을 배우면 불쾌한 소리를 더 많이 듣게 된다는 나쁜 경험을 확산시킨다.

외신기자들 사이에 상당히 유명한 일본인 기자가 있다. 그가 외신기자 클럽에서 질문하는 것을 현장에서 본 게 14년 전인데 그는 지금도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다. 나이는 이미 70을 훨씬 넘겼다.

많은 한국 사람들에게 과거를 망각한 대표적 일본인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그는 질문할 때 유창한 우리말을 쓴다. 그의 질문에서는 상대에 대한 경멸을 나타내거나 모욕감을 주는 단어는 쓰이지 않는다. “친일청산법이라고 하는 명칭이 오늘날의 일본과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을 처벌한다는 느낌을 준다”라는 식이다.

한국 당국자들과 그와의 문답을 기사를 통해 접하는 한국인들은 편집자가 자극적으로 뽑은 제목 때문에 격분하지만, 사실 현장에서 지켜보면 ‘일본이 언젠가 저런 반론을 제기할 줄 알았다’는 생각부터 앞선다.

오히려 우리의 편향적인 말 습관이 배제가 되니, 그의 한국말이 더 강한 공격력을 가질 때도 있다.

어제의 공영방송과 앞서 소개한 영국 타블로이드 언론은 또 다른 면에서도 비교할 구석이 있다.

한 쪽은 듣는 사람의 감정을 이끌어내려 하고 있고 다른 한 쪽은 그냥 있는 감정을 전달하고 있다. 말은 후자의 경우에 더욱 강해진다.

섣불리 감정부터 담아내려 하는 우리의 말 습관이 우리말의 힘을 떨어뜨린다. 전달력이 떨어지는 말은 배우고 싶은 흥미를 일으키지 못한다.

언어권의 확대는 경제력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우리말에 흥미를 느끼고 배우고 싶어지는 사람이 늘어나면 지도상으로 표시되지 않는 한국어 영역이 확대된다. 그 나라 말의 영역이 확대되는 것은 그 나라 경제권으로 편입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이다. 경제력이 확대되는 밑바탕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가치관이나 편견이 난무하는 그런 언어라면 자기나라 사람들 말고는 쉽게 확대되기 어렵다. 이런 나라들일수록 영어를 쓰면 뭔가 더 고급스럽고 우월해 보이는 ‘언어 사대주의’가 심하다. 영어를 쓰면 더 대접을 받는데 뭐 하러 애써서 그 나라 말을 배우겠나. 배워봐야 기분 나쁜 소리만 자꾸 들릴 텐데. 그 나라 경제의 확장기반이 무너지는 것이다.

사족.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어제 일본이 더 이상 상위로 진출하지 못하고 탈락해서 한결 여유(?)로워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 본심을 우리조차도 알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 언행은 너무나 쉽게 상대가 우리 본심을 알아차리게 한다. 고쳐야 할 약점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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