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산분리, 반재벌 정책이 아니라 은행·기업 모두 보호한 원칙임을 인식해야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약 20년 전, 삼십 중반 나이에 금융기자가 되면서 깊이깊이 다짐했던 것은 다시는 내 나라에 필요한 경보를 발동하는 일을 실패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그보다 앞선 2년을 은행의 외환시장 조사담당자로 보냈다. 환율이 오르내리는 보고서를 썼던 매일매일의 일이 우리나라가 외환위기국으로 망해가는 과정을 지켜본 것이었음을 나중에 깨달았다.
 
그 세월동안 내 보고서에서 단 한 번도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지적을 못했다. 지식이 부족한 탓도 있고, 세상흐름에 빠져버린 탓도 있다. 본지를 통해 연재했던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에 이 때 일들을 담았다.
 
고난의 시기에서 얻은 교훈은, 지금 당장은 고리타분해 보이는 원칙이지만 이를 저버렸을 때 댓가는 혹독하다는 것이다.
 
금융기자로 글을 쓰는 동안, 또 다시 이런 심각한 위기를 초래할 만큼 위험한 일로 은산분리가 무너지는 것만한 것이 없다. 따라서 지금의 인터넷은행 은산분리 완화 논의를 매우 우려스럽게 지켜보고 있다.
 
은산분리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은산분리 역시 금융현안의 속성대로 매우 복잡한 구조를 갖고 있다. 어떤 취지와 논리를 통하느냐가 결론 자체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앞서 밝혔듯, 인터넷이든 시중은행이든 일체의 은산분리 완화 시도에 대해 매우 비판적인 개인의견을 갖고 있다. 하지만, 결론에 이르러 은산분리 보존에 뜻을 같이 하는 목소리라 해도, 그런 주장의 출발점이나 논리 전개과정이 건전치 못하다면, 우리의 금융경제 안보를 지켜 준 이 중요한 원칙을 더욱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그러한 ‘동의할 수 없는 은산분리 옹호’를 몇 가지 언급해 본다.
 
우선, 문재인 대통령을 무조건 싫어하는 사람들의 은산분리 완화 반대다. 극심한 정치적 진영논리에 빠진 사람들이 세상에 도움 되는 것은 단 하나도 없다. 뭐든지 내가 싫어하는 대통령이 하니까 싫다는 심정의 표현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길게 논할 필요도 없다. 역으로, 문재인 대통령을 무조건 좋아하는 사람들의 찬성도 마찬가지다.
 
은산분리는 이명박 전 대통령 시대에 잠시 후퇴했다가 박근혜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바로 원상태를 회복했다. 진영논리는 단 한구석도 끼어들 여지가 없음을 지난 역사가 똑똑히 보여주고 있다.
 
그 다음, 오로지 재벌비판만을 앞세우는 사람들의 은산분리 고수 주장이다. 은산분리를 재벌을 규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 문재인 대통령이 7일 인터넷은행에 한해 은산분리 완화 방침을 밝히고 있다. /사진=뉴시스.

재벌의 은행소유를 막는 것이 은산분리라고 하니 전형적인 재벌규제 정책처럼 보이는 면이 있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서 은산분리는 은행업 뿐만 아니라 재벌을 포함한 비금융 산업을 모두 보호하기 위한 원칙이다. 한국은 은산분리법으로써 이 원칙을 보호하고 있지만, 금융선진국에서는 시장의 관행과 당연한 경제이치로 은산분리가 자동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은행을 소유하고나면 제조업이나 건설업 분야에서 꼭 필요한 산업 활동까지 포함해 많은 것들에 제약이 생긴다. 억지로 그런 활동을 하려들면 그 사람의 은행은 금융시장에서 거래상대방이 사라지는 고립된 처지가 되고 끝내 퇴출 운명을 맞게 된다. 이 세상에 GE캐피털은 있어도 GE은행은 없고, 골드만삭스 건설, 셰브론은행, HSBC전자는 없다.
 
한국의 현실에서는 삼성 돈 20조원을 200만 명에 나눠주자고 할 정도로 재벌에 대단히 비판적인 사람이 오히려 집권당의 원내대표로서 은산분리 완화에 총대를 메게 생겼다. ‘유체이탈’의 체험이 되지 않을까 싶다.
 
거듭 강조하지만, 은산분리에 담긴 본연의 철학이 절대로 반재벌 사상이 아니다. 은산분리가 반재벌 정책이라면, 재벌중심 경제를 개발한 예전의 군사독재자들이 이 원칙을 폐기했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지나 노태우정부에 이를 때 한때 은행이 34개에 달했다. 이 가운데 잠시라도 재벌은행이었던 곳은 한 군데도 없다.
 
끝으로, 자신을 선지자나 ‘아무개 동네의 현인’으로 과시하고 싶은 사람들의 은산분리 고수 주장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정책이 어떤 변화를 얼마만큼 가져오는 지에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일이 벌어지니 자존심이 상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의 현실감 없는 주장을 듣는 사람은 끝내 은산분리란 다 이렇게 철없는 논객들이나 하는 소리라는 느낌을 받게 된다.
 
앞서 밝혔듯, 나는 줄곧 은산분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서, 어떤 종류의 은산분리론이 오히려 혐오감을 유발하는지를 논했다.
 
반대로 은산분리 완화론에도 역시 귀담아들을 것이 있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 있다. 그걸 자세히 구분하는 것은 은산분리 완화론자에게 맡기고자 하지만 딱 하나 제일 흉물스런 것만 지적한다.
 
소위 재계단체나 그 주변에서 오가는 얘기만 듣고 은산분리를 이명박식 표현처럼 전봇대규제의 하나로 여기는 작태다.
 
상투적인 어휘 ‘기업하기 힘들게 만드는 규제’ 한 줄로 은산분리에 담긴 금융의 조심스러움과 이 원칙의 역사성을 모두 깔아뭉개버린다. 그 지적인 천박함이 역겹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문재인 대통령이 나서서 인터넷은행의 은산분리 완화를 언급한 이상, 이를 다시 철회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 됐다.
 
이제 관건이 되는 것은, 기존의 4% 제한을 높이면 어디까지 높여야 하나. 그리고 인터넷은행에만 제한한다는 다짐이 세월이 흘러도 과연 지켜질 수 있느냐에 대한 논의다.
 
4%였던 것이 갑자기 30%가 된다면, 나중에 그 덕택에 인터넷은행이 시중은행에 맞먹을 정도로 성장했을 때 재벌들이 차별철폐를 주장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반박할 것인가.
 
설령 30%, 50%가 정답이라 해도, 그것은 현실과 거리가 있는 이론교과서의 연습문제 해답일 뿐이다. 국정이란 것이 그렇게 들쭉날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중요한 원칙을 일부 손질하기로 나섰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신중하고 무겁게 국정을 대하는 태도를 보여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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