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 부동산 보유 폭증 속 한국 제조업 경쟁력은 뒷전으로

▲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최원석 경제 칼럼] 1990년대를 뒤돌아 본다. 당시 김영삼 정부가 재벌들을 향해 뽑아 든 특단의 칼 중 하나는 ‘부동산 실명제’였다. 기업들이 본업에는 충실하지 않은 채 부동산 투기 등 다른 부업에 더 눈독을 들인 것도 부동산 실명제 추진의 한 배경이었다고 당시 정부관계자가 기자에게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부동산 실명제는 1995년 1월 시행됐다.

당시는 한국의 기업 경쟁력이 급속히 저하되던 시절이다. 반도체, 철강 등 소위 일부 수출산업의 착시 속에 한국경제는 속으로 멍들고 있었다. 재벌들은 땅장사로 떼돈을 벌고 있었지만 그것이 문제였다. 당시 정부 관계자는 “재벌들이 본업에 충실해야 나라 경제가 살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아쉽다”며 혀를 찼다. 필자가 서울의 한 종합일간지에서 지금 기획재정부의 전신인 재무부에 출입하면서 기사를 쓰던 때 일어났던 일이다.

재벌들이 딴 짓을 한 결과는 자명했다. 한국 경제는 1997년 말 치욕의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에 돌입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너무 비약하는 것 아니냐고 지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말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았을 때 삼성을 비롯해 우리나라 전체 재벌그룹 모두가 구조조정 대상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삼성그룹을 제외한 대부분 재벌이 부채비율 200%를 웃도는 처참한 상황에 몰렸다. 시중금리가 천저부지로 치솟던 당시 위기 상황에서 부동산이 많은 것만으로 위기의 방어막이 되지 못했다.

그 후 재벌들의 부동산 탐욕은 사라진 것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재벌들의 부동산 욕심은 그 후에도 지속됐고 최근들어 절정에 달하고 있다. 2014년 현대차 그룹은 서울 강남의 요지 ‘한전부지’를 매입하는 데 10조원 넘게 썼고 서울시내 요지의 다른 땅들도 재벌들의 손에 속속 넘어갔다.

과거 부자동네의 상징이었던 서울 장충동 일대 부동산 중개업소에 들르면 “장충동 요지의 땅들이 A그룹, B그룹에 점령당한지 오래다”는 이야기를 쉽게 들을 수 있다. 서울 강남 요지 압구정동, 청담동 일대에도 굴지의 재벌 땅이 널려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심지어 과거 장관급을 지낸 한 분은 기자에게 “압구정동, 청담동 일대 땅주인이 누구인지 취재해 보라”고 할 정도다.

그러나 지금 한국 재벌들의 형편은 좋아졌는가. 한전부지를 비싼 값에 매입한 현대차 그룹의 상황이 지금 승승장구중인가. 한때 숱한 논란을 이겨내고 서울 잠실에 한국에서 최고 높은 빌딩을 세운 롯데그룹의 상황은 해맑은가.

지난 8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과 정동영 민주평화당 의원이 국세청에서 제출받은 지난 10년간(2007~2017년) 토지·주택 등 부동산 소유 통계 자료를 보면 한마디로 말문이 막힐 정도다. 이 기간 개인 보유 토지는 5.9% 줄어든 반면 법인 보유 토지는 무려 80.3%나 증가했다. 법인 보유 토지 증가량은 판교신도시의 1000배, 서울 여의도의 3200배나 된다고 한다. 특히 법인 중 상위 1%(1752개사)의 토지 증가율은 140%나 돼 판교신도시의 700배, 여의도의 2100배 규모로 폭증했다고 한다.

재벌들이 땅을 열심히 사들이는 동안 한국의 제조업 경쟁력은 어찌되었는가. 반도체를 제외하면 모두가 위태롭다는 말이 나오는 게 최근 한국 제조업의 현실이다. 많은 분야에서 중국에 속속 추월당했거나 추월당할 위기를 겪는 와중에도 한국 재벌들은 부동산에 커다란 애착을 보여 왔음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서울 부동산 값을 부추긴 상당한 원인이 대기업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임에도 최근 부동산 대책 속에 재벌 책임을 묻는 기류는 없다.

지난달 28일 본지가 주관한 ‘자동차 대체부품산업 활성화 방안’ 세미나 때 “현대차그룹이 한전 부지를 10조원 넘는 돈으로 사들일 즈음 중국 지리자동차는 10조원으로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 지분 9.69%를 사들였다”고 밝힌 한 전문가의 얘기가 가슴에 확 와 닿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의 재벌들도 부업이 아닌 본업에 더 신경 썼으면 하는 바람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이 글을 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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