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에 대한 단상...新한류는 시골 문예회관부터

 

[초이스경제 김용기 칼럼] 대한민국의 공식적인 개항은 1876년이었다. 일본에 의해 강제로 서해 포구의 문을 연 강화도조약 이후로 서구의 문물이 유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주체성을 상실한 개방은 결국 제국주의 국가들에 의한 식민지로 전락하는 밑거름이 되었고, 20세기 초엽 우리나라도 일본에 의한 강제 합방으로 나라의 정통성이 부정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일본의 지배기간을 통틀어 일제가 우리에게 시행한 최고의 정책은 아마도 ‘문화말살정책’이 아니었나 싶다. 우리의 글과 말이 부정당하고, 창씨개명을 통해 다른 이름을 강제하고, 대대로 소중히 여겨온 우리의 것들이 훼손되었던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벅찬 기쁨을 누렸으나 그것도 잠시 뿐, 민족적 정통성과 우리 문화의 복원을 시도하기도 전에 남과 북으로 편을 갈라 누구나 다 아는 전시에 돌입하게 된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수준의 나라라는 꼬리표를 얻었고, 그를 계기로 먹고 살만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 거의 반세기에 걸쳐 오로지 경제발전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문화는 등한시되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이념전쟁도 서서히 종식되기 시작한다. 집단과 단체의 이념에 물들어 있던 일련의 무리들은 순식간에 개인으로의 자기를 찾으려는 반전의 움직임을 보인다. 바로 집단으로부터의 개인을 구별 짓는 고유의 취향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신세대를 지칭하며 유행한 ‘X세대’라는 말도 근본적으로 ‘나는 남과 다르다’는 가치관이 확산되면서부터 탄력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게 남과 다른 나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사회에선 필연적으로 라이프스타일이 중요해진다. 그걸 다른 표현으로 바꾸면 문화가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본격적으로 문화예술을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에 이르러 비로소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미국, 일본, 홍콩 등 당시 문화선진국의 대중문화 유입으로 우리 문화는 고유성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 국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애호와 탁월한 감식안을 바탕으로 각 분야에 뛰어난 아티스트가 발굴되면서, 세계와 당당히 경쟁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제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한국영화는 단골손님이 되었고, 국내의 뮤지컬산업도 어엿하게 꼴을 갖추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K-POP은 동시대의 트렌드를 제시할 정도로 성장했다. 바야흐로 대한민국의 문화가 세계인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 세계는 아무런 비명이나 고함도 없이 여전히 가장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고 있다. 바로 문화산업의 전쟁이다. 세계는 이제 동시간대에 접속되는 네트워크로 인해 점점 가까워지고 있고, 이런 환경에서 산업적인 발전을 계속 이어질 수 있는 분야는 오로지 문화산업과 IT산업 정도에 국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잉글랜드의 프리미어리그 및 스페인의 프리메라리가와 더불어 세계 3대 축구리그로 유명한 이탈리아 세리에A의 축구 실력도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작은 마을 하나에도 잔디구장이 3~4개씩 지어져 있고, 야간게임이 가능한 조명시설이 다 구비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 기초적인 제반환경의 지속적인 투자가 오늘날 이탈리아를 축구 강국으로 만들어준 원동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지금 세계적으로 K-Pop의 열풍에 힘입어 국민의 관심사나 정책 방향도 한류에 초점이 많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이 한류 열풍도 지속적인 콘텐츠 개발에 실패한다면 어느 순간 거품처럼 사라질지도 모르는 게 냉정한 답이다. 대한민국의 문화가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오랫동안 전 세계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풀뿌리문화예술의 정착이 반드시 필요하다. 지방의 작은 문예회관에서부터, 지역의 작은 커뮤니티마다 문화예술의 토대가 이루어진다면 정부가 주창하는 문화융성 대한민국에 다가가는 것도 조금 더 가까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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