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지난 구시대 사고방식의 참모들이 불필요한 비판을 자초한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세습 3세에 접어들고 있는 재벌회장들은 서민들의 추측과 달리, 자신들이 얼마나 큰 행운을 누리고 있는지를 잘 느끼지 못하는 모양이다.

2세 회장들만 해도, 창업부친이 한참 고생할 때 태어나 그 시대 다른 집처럼 아버지로부터 맞고 자라기도 해서 심성의 상당부분은 서민들과 통하는 면도 있었다. 2세 회장 중에는 젊어서부터 아버지 대신 감방을 다녀오더니 늙어서 자식을 대신해서 또 다녀온 사람도 있다.

3세는 완전히 서민적 고생과는 담을 쌓은 가운데 인생을 출발했다. 자신이 얼마나 하루하루 풍요한 삶을 누리고 있는지를 실감할 수가 없는 사람들이다. 창업조부가 그룹을 키워낼 때의 서민 같은 삶은 ‘물려받은 전설’로서 아름다운 것이지, 자기의 가문이 다시 그런 형편으로 돌아가는 상황은 절대로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다.

서민들의 ‘나도 재벌이 돼보면 얼마나 멋질까’라는 환상은 실제 재벌에게 있어서는 ‘내가 서민이 된다면 얼마나 끔찍할까’라는 두려움으로 변형돼 존재한다.

이런 두려움은 왕조시대 임금들이 갖고 있는 것과 상당히 비슷한 심리다. 이 시대 왕자들은 태생으로부터 ‘금지옥엽’의 지위를 위협할만한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 경계심을 키우면서 자랐다.

행여 삼국지 조조와 같은 권신에게 쥐어잡히는 군주가 되는 것은 이 세상 모든 왕들이 갖고 있던 공포의 출발점이었다. 왕자의 수업을 받는 첫날부터, 신하들 앞에 어떤 목소리, 어떤 걸음걸이를 보여줘야 저들이 나를 만만히 보지 않을 것인가라는 근심 속에 매일을 보낸 것이 임금들의 삶이었다.
 

▲ 조조는 하루아침에 권신이 된 게 아니다. 황실이 해야될 일을 하나씩 조조가 자신의 가병들을 이끌고 해내다 보니 어느날 천하의 백성들은 황제가 아니라 조조가 나서야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중국드라마 '삼국'에서 조조가 훗날 자신과 똑같은 권신이 될 사마의에게 친근감을 과시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장면이다.


그래서 왕가에서 선대의 왕들이 제일 심혈을 기울인 것이, 어떤 고명대신을 자식에게 남겨주느냐였다. 즉위 초, 매사에 서툴 것이 확실한데 이런 모습을 최대한 감춰주고 진정으로 꼭 필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아 자신을 대신해 부모역할도 함께 해 줄 신하를 고명대신으로 정했다.

이 세상에서 단 하나, 새로 즉위한 임금의 허술한 모든 면을 지켜보게 될 사람이기도 하다. 백성들과 다른 신하들에게는 선왕의 자식답게 영특하고 총명한 새 임금으로 포장돼 있지만, 고명대신의 눈에는 빈틈만 가득한 철부지다. 만약 이 고명대신이 선대 임금의 기대와 정반대로 역심을 품게 되면, 그 왕조는 단숨에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된다. 중국의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나뉘게 만든 신나라 왕망이 그런 예다.

훗날을 준비하는 임금에게 고명대신을 고르는 일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업적만큼 중요한 일이었다. 삼국지 제갈량은 말할 것도 없고, 명나라 장거정, 청나라 장정옥이 이와 같은 명신으로 이름을 지금도 전한다. 그러나 장거정과 장정옥은 자신들이 보호한 신종 만력제와 고종 건륭제가 장성한 후 험한 일을 겪은 불운한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또한 은인인 자신을 잡아먹으려고 들 만큼 어린 임금이 성장하도록 잘 보호했다는 방증의 하나가 된다.

한국의 기업사에서 후사를 맡은 전문경영인과 회장의 갈등이 살짝살짝 전해지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지분구도의 주요계열사마다 지분을 나눠가져 ‘충신 중의 충신’임을 과시했지만 끝내 그룹과 결별하는 과정이 좋지 못했다. 아주 오래전에는 전문경영인과의 갈등으로 인해 2세 회장이 자살하는 비극도 있었다.

한국 재벌회장들에게 차세대를 보필할 전문경영인을 고르는 일은 임금이 고명대신을 고르는 일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대그룹 경영권의 상속이 이뤄진 초기에는, 아버지 회장 때의 인재들이 여전히 건재해 아들 회장을 도우며 기업을 이끌어간다. 아버지 때의 가치관이 한동안 남아 있다.

그러다보니, 재벌그룹 내에 철지난 구시대 사고방식이 그대로 남아 미래에 역행하는 모습을 드러낼 때가 있다.

하나 둘씩 물러나고 있는 2세 회장들 시대에는 재벌과 은행 관계가 이런 문제의 하나였다.

창업회장들이 기업을 키울 때, 사채금리는 못해도 15%였다. 20%나 그 이상을 훌쩍 넘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자금이 귀했다.

“계열사 가운데 은행만 하나 있어도...” 재벌들이 이런 염원을 갖는 게 당연했다.

그런 염원이 선대의 창업공신들을 통해 그대로 2세 시대에도 전해졌다. 하지만 이때는 이미 세상이 바뀌었다. 삼성전자는 국채금리보다도 낮은 금리에 채권을 발행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물려받은 DNA 때문인지, 은행소유에 대한 염원은 그대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기업과 정부, 그리고 기업과 시민단체, 기업과 전문가 사이에 불필요한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증권사, 보험사, 카드사 등 금융계열사가 무슨 일만 하면 “은행 세우려는 음모”라는 비판이 나왔다. 상당부분은 은행에 대한 집착을 그대로 전달시킨 구시대 참모들 책임이라 안할 수 없다.

3세 회장 대에 이르니, 지금의 ‘고명 참모’들이 해야 할 중요한 일에는 대중과 3세 회장간의 노출 차단이 추가되는 듯하다.

아비에게 맞고 자란 적이 있는 2세만 해도 남들 앞에서 그럭저럭 앞가림 하겠다 싶었지만, 완전히 금지옥엽으로 나서 자란 3세는 정말 준비 안된 상황의 노출이 그룹 차원에서 두려운 모양이다. 재벌 참모들은 3세 회장이 다수 공간에 등장하는 일을 어떻게든 막으려고 한다.

국회가 상임위원회나 국정감사에 재벌 총수를 불러내려고 할 때 기를 쓰고 이를 막는 것이 과연 회장 본인 생각인지, 참모들의 결사적인 보호막 때문인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국회 다녀간 회장들의 손익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국회 다녀가서 손해 본 적이 있는가. 청문회 몇달 후 구속된 회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청문회와 전혀 상관없고 죄질이 그만큼 시급한 처벌을 요구했다. 그나마 청문회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처벌을 요구하는 국민적 ‘법 감정’이 잠시 누그러진 면도 있다. 그래서 구속이 몇 달 미뤄졌고 1년 쯤 지나 감형으로 풀려난 밑바탕이 되기도 한 것이다.
 

▲ 국회의 2016년 12월 '최순실 국정농단' 청문회에 대거 참석한 재벌회장들. 오른쪽부터 허창수 전국경제인연합회장(GS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태원 SK그룹 회장,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고 구본무 LG 그룹 회장, 손경식 CJ그룹 회장. /사진=뉴시스.


금지옥엽으로 자란 3세 회장일수록, 진솔한 대중노출은 값진 기회가 될 수 있다. 1988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전설의 토론을 남긴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 필적하는 이미지를 과시할 기회도 된다.

그런데도 회장들은 기를 쓰고 국회는 외면한다. 오라는 국회는 안오고 인스타그램 같은 곳에 물정모르는 글을 올렸다가 공매를 자초한다. 국회 답변에서 실언이 나오면, 비록 웃음거리 동영상이 돌아다니긴 해도 대다수 국민은 긴장 상황에서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한다. 인스타그램의 헛소리는 “누가 물어나 봤나”라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이렇게 장성한 3세를 열겹 스무겹 포데기를 씌우고 감추고 나니, 그룹의 얼굴 노릇을 하고 돌아다니는 건 3세를 보좌하는 인물들이다. 좋든 나쁘든 국정감사와 같은 곳에 등장해 발언하는 순간은 상당 수준으로 자신을 그룹전체의 이미지와 동질화시킨다. 이미 신상품 출시현장 등에서 수도 없이 대중에 노출되는 사람들이 이런 순간도 3세 대신 자기 얼굴을 들이민다.

성가시게 국회가 자꾸 부를 때마다, 사장을 대신 내보내면 3세는 그날 하루 큰 짐을 더는 것이긴 하다. 그 시간에 사장은 온갖 질문에 시달리는 모습을 노출하면서 어느 덧 이 회사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만든다. 소비자들 눈에 육성 한번 들어본 적 없는 3세보다 눈앞의 이 사람이 더 회사의 상징이다.

조조는 하루아침에 조조가 된 것이 아니다. 한나라 황제가 해야 할 일을 하나 둘 자신이 나서서 떠맡다가 어느 날 보니 이제 황제에게는 조조 허리춤의 칼을 풀라고 명령을 내릴 수도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3세 시대에 접어드는 한국 재벌들이 어떻게든 대중노출을 회피하려고 하는데, 이런 측면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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