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학위 취득하자 마틴 교수는 박사학위 권했으나 뿌리치고 귀국

네덜란드 유학중 주말이나 방학엔 여행도 실컷 다닐 수 있었다. 심지어 졸업논문마저 유고슬라비아 여행(field trip)을 하고 그 나라에 대한 논문을 써야 했으니 한편으론 여행 또한 학습의 연장이기도 했다.

우선 주말엔 깨끗한 열차를 타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차창을 통해 즐기며 다이아몬드의 도시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그 때마다 느낄 수 있는 것은 네덜란드인들은 모두 친절하다는 사실이었다. 더구나 그들의 모습은 여유가 있으면서도 질서정연했다.
 
그러다가 가을 방학이 되어서는 런던으로 향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런던사람들은 ‘꼬리아’라는 단어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분위기였다. 자기들이 한국전쟁에 참전까지 하며 큰 역할을 했으면서도 한국을 모르다니 나 또한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시 분위기도 한국보다 많이 앞서 있다는 느낌만 들었을 뿐 네덜란드와는 달리 어딘지 모르게 짓누르는 듯 무거웠고 날씨도 우중충하여 딱 가라앉은 분위기속에 아쉬움이 많은 도시처럼 느껴졌다. 런던은 ‘애수’라는 영화에서 본 그대로 안개낀(smoggy) 도시였다.
 
나는 런던에 들른 김에 아내에게 줄 버버리 레인 코트 한 벌을 샀는데 아내는 최근까지 이 옷을 가끔 꺼내 입을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가 몇 년 전에 막내딸에게 넘겨서 딸이 잘 입고 직장에 다니고 있다. 막내 딸 동료들도 “예쁘다” “어디서 샀느냐”고 묻기도 한다고 한다. 고전적 디자인은 바느질도 튼튼하여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고치거나 꿰멜 데가 하나도 없단다. 유럽에서는 이렇게 물건 하나를 만들어도 오래 입을 수 있도록 튼튼하게 만드는 장점이 있다.
 
또한 주말 휴가때엔 한성실업에 다니는 친구와 함께 벨지움으로 몸을 옮겼다. 와플의 나라 벨지움에선 브라셀 시청앞 광장에 있는 그로스 마르크트(Gross Markt)에서 아주 바삭하게 구운 와플을 먹어가며 즐기다 온 것이 가장 큰 추억으로 남아있다.
 
이어 독일에 들렀을 때 한성실업 친구는 모젤 와인이 일품이라며 호들갑을 떨었지만 맛이 너무 달아선지 내가 즐기는 와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겨울방학기간 중 내게 가장 추억에 남는 일정은 스페인 여행이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동기였던 영식이라는 친구가 외무부에 입사해 스페인 영사로 가 있었는데 그로부터 스페인에 한 번 오라는 초청을 진작에 받은 터라 나는 친구를 데리고 밤새 열차를 타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스페인은 광활하면서도 흥겹고 재밌는 나라였다. 우리가 스페인 피레네 산맥 국경에 도달했을 때 육자배기를 연상케 하는 스페인 민요가 흘러 나왔고 커피에 우유를 반반 섞어 넓은 잔에 담아주는 카페가 몹시 인상적이었다. 스페인 경찰청 광장에서는 12월31일과 1월1일 사이에 종이 울리면 많은 사람이 자기 나이만큼의 포도를 갖고 나와 먹고 즐기는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스페인은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뭇솔리니 만큼이나 독재자로 불리는 프랑코 총통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는데 독재자 답게 총통이 사는 대통령궁은 삼엄했고 나 또한 그곳에서 사진을 촬영하려다 제지를 당하기도 했다.
 
스페인은 정치만 빼놓고는 맘 놓고 먹고 즐기는 나라였다. 우리는 저녁 식사를 할때 몇 분안에 뚝딱 해치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그들의 저녁식사는 저녁 9시에나 시작됐고 자정 쯤에나 끝났는데 무엇보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맛있었다. 특히 생 돼지 뒷다리를 말려서 만든 하몽에다 색깔도 예쁘고 달콤한 샹그릴라 포도주를 한 잔을 곁들이면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스페인 총통은 자신의 독재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의 정치적 간여를 엄금하는 대신 먹고 노는 일로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든 여행이 즐거운 건 아니었다. 겨울 방학이 끝나고 3학기가 되자 졸업 논문이 걱정이었다. ISS의 논문 테마가 이상했기 때문이다. 내가 공부하는 분야가 경제학이다 보니 졸업 때까지 유고슬라비아를 여행하고 그 나라의 경제에 대해 논문을 쓰라는 오더가 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내 처지가 난감했다. 그때만 해도 유고슬라비아는 당국의 허락없이는 갈 수 없는 적성국이었기 때문이다. 티토가 2차대전후 5개나라 6개 민족을 통합해 만든 나라가 바로 유고슬라비아였는데 그 나라 또한 북한처럼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난감해진 나는 고민 끝에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 유고슬라비아 방문 가능 여부를 물었고 그곳 직원은 대사한테 여쭤보라 했지만 대사 또한 본국에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다는 답변 뿐이었다. 그 후 본국으로부터 유고에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고 가까스로 유고행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가본 유고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딴판이었다. 말이 사회주의였지 화폐도 쓰고 시장주의도 도입된 상태였다.
 
지금의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도시인 자그레브에서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에 도착할 때까지 포스토니아 동굴도 구경하고 관청에 들러 각종 통계자료도 구할 수 있었다. 또 잠깐 쉬는 시간을 틈을 타 베오그라드 시외 다뉴브강과 자바강이 만나는 관광지에 들렀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한국말로 “아~ 대단하구먼, 마치 두만강과 압록강이 만나는 것 같구만”하고 외치는 소리에 북한 사람 두 명이 내 근처에 있음을 확인하고 호텔로 줄행랑을 놓은 일은 지금도 아찔하기만 하다.
 
한편 유고는 사회주의 답게 경계가 삼엄했다. 그러나 땅이 비옥하고 산림도 풍부 했으며 사람들의 인심 또한 넉넉한 나라였다. 특히 식탁보와 같은 수공예품이 발달한 나라이기도 했다. 나는 유고를 여행하면서 계획경제속에서도 개인소유권이 어느정도 인정되고 경제활동에 대한 자유도 상당히 보장된다는 자료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이를 토대로 ‘유고슬라비아의 소비 함수에 관한 연구논문’을 써 낸 끝에 석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석사학위가 끝이 아니었다. 네덜란드 유학이 끝날 때가 되고 나니 옥스포드 출신 학과장인 마틴박사가 자신이 옥스포드대나 라이든(Leiden)대학에 추천해 줄테니 박사학위 과정을 더 밟는 게 어떠냐는 요청을 해 온 것이다. “미스터 리는 성적이 좋으니 박사학위까지 획득한 뒤 한국에 돌아가 크게 기여하라”는 게 그의 주문이었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하기 위해 유학기간을 연장하면 사무관 자리가 없어질 것을 우려해 나는 고민 끝에 거절 했고 이에 마틴 박사는 “내 제안에 미스터 리가 좋아할 줄 알았는데 의외라며 이유가 뭐냐” 고 다그쳤다.
 
그래서 내가 “한국에는 채용고시제도라는게 있는데 유학을 더 하게 되면 사표를 써야 한다”고 하니까 곧바로 돌아오는 대답이 “It's Funny"였다. 이 말을 듣고나니 내 심경은 그야말로 복잡하고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참으로 우습다“는 얘기인지, ”어리석다“는 얘기인지, 무시당한 것 같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해 도무지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평생 한번 올까말까한 기회인데 이를 날려버렸다는 후회도 막심했다. 그렇게 나는 마틴박사의 알듯모를듯한 충고를 뒤로한 채 1년 반의 정든 유학생활을 마치고 아름다운 나라 네덜란드와 아쉬운 작별을 고해야 했다.
 
그 후 나는 한국에 와서도 내가 왜 마틴 박사의 제안을 거절했는지를 놓고 굉장히 후회한 적이 있다. 특히 재무부로 근무지를 옮겨 괄시를 받을 때 마다 마틴 박사의 제안을 뿌리친게 더욱 후회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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