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성장 속에서도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확신을 지켜준 비결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최근 한국 경제는 성장률이 3%에 미달하고 전대미문의 고용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해서 경제정책의 최고위층 두 명이 동시에 교체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가가 국민들에게 존재의 명분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가장 극적인 요인은 영토 확장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확장의 순간에는 국민들을 환호하게 만들지만, 관련국과의 갈등을 수 백 년 이상 지속시키게 만든다. 장기적으로는 국가에 커다란 위협요인을 만든다. 로마제국 이래로 이웃나라를 정복해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국가의 존재이유로 삼은 나라 중에 여태 존속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한국사에서도 가장 확장적 정책을 펼쳤던 고구려가 끝내 당나라와의 갈등 끝에 패망하고 말았다. 고려가 고구려를 승계하기는 했지만 고려의 확장정책은 ‘고토회복’이라는 제한적 범위 내에서만 이뤄졌다.

영토 확장과 달리 지속가능하게 국가의 존재기반을 제공하는 것이 경제성장이다. 세월이 갈수록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것을 확인한 국민은 국가와 임금에 대해 ‘두 마음’을 먹지 않는다.

그래서 자전거가 달리는 원리와 같이 국가 경제는 끊임없는 성장엔진의 가동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지혜는 갈수록 새로운 발명을 만들어내니 이것을 잘 활용하면 국가 경제는 하루도 성장을 멈출 일이 없게 된다.

그렇다면,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세계사에서 보기 드물게 518년을 지속한 조선왕조는 과연 반천년 내내 경제성장을 지속했을까.

이 기간 조선 인구는 500만 명에서 1700만 명으로 증가했다고 추산한다. 인구증가는 부양능력의 향상을 의미한다. 국내총생산(GDP)의 기준으로는 인구증가 만큼의 성장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활수준을 나타내는 1인당 GDP도 과연 세 배 이상 성장했을까.

기술력으로 살펴봤을 때, 소에 쟁기를 매서 논밭을 가는 농업기술은 조선 500년 내내 크게 바뀌지는 않았다. 서구의 산업혁명은 조선시대 끝 무렵 개화기에나 영향을 미쳤다. 교통수단은 개국 때나 말기나 사실상 말로 일관했다.

조선의 생활수준을 향상시켰다면, 농공업 기술보다는 상업에서 질적인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한글이 창제되고 성공적으로 대중에 보급되면서 문서화된 약속이 더욱 쉬워졌고, 그에 따라 상행위가 고도화됐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근본적인 기술혁신이 없는 상태에서 경제성장에는 500년 내내 한계를 안고 있었다. 두 차례 전란 이후의 복구과정을 제외하면 성장률 10% 이상을 달성한 해가 거의 없을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흉작이나 가뭄에 따른 마이너스 성장의 시기도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사회는 놀라운 안정을 유지했다. 비슷한 500년 역사의 고려라고 하지만, 민란의 발생빈도는 고려에 비해 매우 적다.

조선은 사회 불안정 요인을 체제 내에서 소화하는 능력이 전 왕조에 비해 매우 뛰어났다고 판단되는 이유다.

오늘날의 태정태세문단수 예성연중과 달리, 조선의 사관들은 왕통을 태태세수덕성중으로 따졌다. 누가 왕이었느냐보다 누가 누구의 아들로 왕통을 이어갔느냐가 더 중요했다. 이런 기준에서는 정종 문종 단종대왕이 정통에서 밀려나고 수양대군과 수양의 요절한 아들 덕종(의경세자. 왕이 되지 못하고 죽었다)이 대신 왕통으로 들어왔다. 역사를 누구의 아들, 아들, 아들로 기록한 것이 500년을 일관할 정도로 권력 유지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탄탄했다.

사회 안정의 한 요인으로는 유학사상의 공과 과도 있다. 일신의 몸가짐을 중시하는 유학이 물질적 불만을 해소하거나 억제하는 수단이 됐다. 그렇다고 다른 문화권 종교처럼 폭압적으로 대중을 통제한 것이 아니고, 민간의 불교나 토속전통을 용인하는 관대한 면모가 사회적 유연함을 가져왔다.

그래도 불만이 수 백 년 누적되면 터져 나오지 않을 수가 없다. 그걸 어떻게 해소했을까.

비결은, 강철 같은 왕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 움직이는 시대적 민심을 왕이 뒤늦게라도 따라간 것이 반 천년 정권안정의 핵심요인이다.
 

▲ 조선의 개국군주인 태조 이성계. 그는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그가 세운 왕조는 시민사회의 여론으로 통치되는 국가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사진=뉴시스.


한 예로, 정암 조광조가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 것이 1520년이다. 그로부터 24년이 지난 1544년 사면 복권되고 1568년 영의정에 추증됐다. 선조는 영의정 추증 전교에서 조광조를 역적으로 몰아 부귀영화를 누린 남곤 심정 이항에 대해 간사한 자들이라고 언급했다. 이들은 생전에 자신도 역적으로 몰렸거나 죽을 때까지 권력을 누리기도 했지만, 50년도 지나지 않아 조선은 이들을 모두 간사한 자들이라고 역사에 못 박았다. 이렇게 내려진 판단은 더 이상 이론의 여지가 없는 최종 결론이 됐다.

옳고 그름에 관해 더 이상 돌이켜볼 일에 대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불필요한 논란에 매달리지 않도록 확실히 매듭짓는 건전체질을 대한민국의 전임 국체인 조선왕조가 갖고 있었다. 그리고 옳고 그른 것에 대한 최종적 판단의 주체는 왕실이나 신하가 아니었다. 민족사를 일관되게 흐르는 사회원칙이 어떻게 판단하느냐를 왕조가 최대한 충실하게 뒤따르려 했던 것이다.

조광조보다 상당히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은 단종의 복권이다. 수양대군에게 1457년 시해된 지 241년 만인 1698년 숙종에 의해 단종의 묘호가 올려 져 역대 임금의 한 명으로 대접받기 시작했다. 단종의 복권은 자동적으로 수양대군이 역적이었음을 공인하는 결과가 되므로 수양의 후손들인 조선 임금으로서 쉽게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수 백 년 세월이 지나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역사가 되고난 후 조선은 뒤늦게라도 역사를 바로잡았다.

국가의 옳고 그름에 대한 체계만이라도 확신을 할 수 있다면 국민들은 국가에 대한 귀속감을 높인다. 성장의 본질 또한 궁극적으로는 민간이 할 일이지 국가가 전적으로 떠먹여 줄 일도 아니다.

정의체계에 대한 신뢰는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출발점이다. 명백히 잘못된 일에 오랜 시간 질질 끌지 않고 시비판단을 분명히 내리는 것을 포함해서다.

사립유치원 회계부정이 한동안 민심을 장악하더니 언젠가부터 일각에서 좌파정치인의 음모라는 식의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이런 식의 접근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흥미를 보이기도 한다.

명백히 잘못된 건 즉시 바로잡아줄 것이란 기대와 달리, 이상한 쪽으로 논란이 길어질 수도 있겠다. 물론, 사립유치원 문제까지 조광조 복권하듯 수 십 년 세월이 걸릴 것으로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단지 불필요한 역피해를 입는 사람을 막기 위한 또 다른 충정이 발현된 것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만약 이런 문제도 수 십 년 걸려 해결해야 할 지경이라면, 수많은 투자자들의 돈을 받은 상장사의 분식회계는 과연 해결할 능력이나 있을 것인가.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이 없는 나라는 세계에서 보기 드물게 자생적 공산주의자가 확산되는 토양을 만들게 된다.

지금 세상에 무슨 공산주의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의외로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좀 있다. 기왕 걱정을 할 거면 뭣이 원인인지도 따져봐야 마땅하다. 다른 나라에서는 다 철지난 사상이라는데, 왜 여기서는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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