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대학원 가고 유학중... 아빠는 모임 나갈 돈이 없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깊은 우정을 나타내는 4자성어로 관포지교, 문경지교, 도원결의 등이 있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전 인물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 중국 춘추시대 제나라 관중과 포숙의 관포지교다. 문경지교는 전국시대 염파와 인상여,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도원결의는 중국 후한 말 유비 관우 장비의 고사다.

제나라 사람인 관중과 포숙은 절친한 친구였으나, 임금 자리를 다투는 두 공자를 나눠서 섬기게 됐다. 관중은 포숙이 섬기는 공자 소백을 찾아가 암살을 시도했다. 관중이 날린 화살이 소백의 허리띠 장식에 맞았으나 소백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입술을 깨물어 피를 흘리며 죽은 척을 했다.

관중이 암살 성공을 확신하고 방심해 돌아온 틈에 소백은 기습공격을 벌여 제나라 임금 자리를 차지했다. 관중이 섬긴 공자 규는 망명을 떠났으나 제나라 압력에 죽음을 당했다. 관중 역시 망명 중이었으나, 소백은 관중이 자신을 죽이려 한 자이니 직접 처형하겠다며 송환을 요청했다.

처형당하려 제나라로 압송되는 수레에서 관중은 수레꾼들이 흥이 나서 수레를 더 빨리 몰도록 노래를 가르쳐줬다. 자기 죽을 자리를 서둘러 가도록 재촉한 것이다.

사실 이 길은 관중이 죽으러 가는 길이 아니었다. 소백이 제나라 임금이 되면서, 중책을 맡게 된 포숙이 “관이오(관중의 본명)는 훌륭한 인재이니 반드시 기용해야 됩니다”라고 간곡히 간언한 결과다.

관중이 망명한 나라에 “중용하겠으니 돌려 보내달라”고 하면 그 나라는 장차 두려운 인물이 될 것을 경계해 보내주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우리 손으로 죽이겠다”고 해야 안심하고 보내 줄 것이란 판단을 포숙이 했던 것이다.

관중이 제나라 송환 길을 재촉한 것은, 친구인 포숙이 이리 나설 것을 짐작한 때문이다.

돌아온 관중은 소백과의 첫 만남에서 제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확실한 계획으로 한 때 자신이 죽이려고 했던 임금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관중을 평생 재상으로 중용한 소백은 크게 나라를 일으켜, 춘추5패의 첫번째인 제나라 환공이 됐다.

사마천의 사기에 관중이 제나라 재상으로 성공한 후 포숙과의 우정을 회고한 발언이 있다.

관중은 “예전에 포숙과 장사를 할 때, 이익을 내가 더 많이 차지하곤 했다. 포숙이 나를 탐욕스럽다고 여기지 않은 것은 내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세 번 싸움에 나가 세 번 모두 도망쳤을 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 하지 않았다. 나에게 노모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준 것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것은 포숙이다”라고 말했다.
 

▲ 오른쪽부터 제나라 환공, 포숙, 관중. 1967년판 어문각 김구용 열국지에 수록된 삽화. /사진=장경순 기자.


나를 알아준 친구가 절실한 인생단계에 기자의 친구들이 접어들었다. 성공을 해서가 아니라 인생의 중대한 전환기에 들어서서다.

대학교 1학년2학기를 개강하던 토요일, 엄청난 비가 쏟아져 수해가 났다. 며칠 후 북한이 구호품을 보내주겠다고 해서 한국 정부가 이를 수용하자 대학교 교련 수업 때 교련 교관들이 저마다 이를 논평하는 것을 들었던 그 세대다. 이제 50중반이 됐다.

이미 얼마 전부터, 많은 친구들이 평생 해왔던 경력의 전환기를 맞고 있었다.

동업을 수 십 년 해왔던 친구는 사업 전망이 바뀌면서 동업을 정리해 새로운 일을 찾아나섰다. 굴지의 대기업에서 말썽 한 번 안부리고 착실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왔던 친구들 중에도 새로운 일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이 생겼다.

지금까지 일 잘하는 것으로 촉망받았던 친구도 갑자기 회사 안팎의 달라진 공기를 체감한다. “혼자 일만 잘하면 뭐하나. 그 직급이면 후배들 월급 줄 돈을 벌어와야지.” 하지만, 평생 기안만 해 온 사람이 어디 나가서 갑자기 영업을 해 올 길이 막막하다. 그렇게 영업을 해 올 거면 왜 남의 회사에 있나. 내 회사를 차리자고 판단한 사람도 있다.

이래저래 뒤숭숭한 처지가 된 친구들이 가득하다. 3년 전 쯤만 해도 정말 부러운 사람들이 많았던 친구들이다.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 간부거나, 젊어서부터 해 오던 사업에 아무 이상 없었다. 아이들은 하고 싶은 공부 다 가르쳐서 대학원도 보내고 유학도 보냈다.

이 때, 우리보다 조금 더 연배가 높은 선배들로부터 평생 그렇지는 못할 것이란 신호가 좀 있기는 했다.

모임에서 회비를 의논하는데, 2만원은 무난하지만 3만원에서부터 만만찮은 거부정서가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잘 나가는 선배들이 회비 3만원을 두려워하다니...

선배들이 인색해서가 아니라 그럴 형편이 된 것으로 추측은 했다. 하지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다. 계속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분들이 많은 건 알았지만, 그래도 아는 사람은 아는 위치를 유지하는 분들이다. 아이들은 저마다 어디 외국에 나가서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회비 3만원에 겁을 내다니... 과연 이것이 우리 친구들이 곧 맞이하게 될 운명인지 실감할 수가 없었다.

점잖게 표현해 경력전환이지, 살림의 관점에서는 수 십 년 끊임없이 들어오던 월급의 중단이다. 들어올 돈이 없어지면, 만 원 한 장의 지출을 뼈로 체감하게 된다.

그래도 우리 또래 가장들은 아버지들로부터 배운 혼이 있다. 어떻든 자식 공부는 끝까지 해야 한다. 그것이 스스로에게 가장 큰 존재이유다.

그래서 누가 보면, 지금 상당히 궁핍한 형편을 더욱 알아주지 못하는 것이다. 어디 가서 하소연 할 수도 없다. “애를 유학 보내놓고 돈이 없다니, 뭐하는 짓이야”란 핀잔만 들을 일이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든 것이 돈이다. 대문만 열고 나가면 돈을 안 쓸 수가 없다. 답답한 세월, 친구에게 털어놓고 위로도 받고 싶지만, 점잖은 아저씨들이 모이는 자체가 맨입으로 해결되는 방법이 없다.

혹시 모임을 할 때, 자꾸 일이 생겨서 먼저 가는 친구가 있다면 굳이 잡으려 들지 말아야 한다. 오늘 자리는 그 친구의 재정 능력을 벗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몇 년 전까지 먹고 마시고 싶은 대로 심야에 호기를 부리던 그 친구가 아니다.

관중이 자신을 살려준 제환공에게 처음 한 얘기다.

“백성들은 곡식창고가 가득차야만 예절을 알며, 의식이 풍족해야만 영욕을 알게 된다.”

주머니 사정이 뒷받침돼야 ‘아재의 체면’에 따른 위엄을 보일 수 있다. 그런 사정을 친구가 아니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처자식은 알려고 들지도 않지만, 이들에게 절대 알리고 싶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다만, 여기서 또 하나 중요한 것이 있다. 이런 처지를 알아주는 나만의 ‘포숙’을 잘 구분해야 한다.

궁색한 처지를 일일이 얘기 안해도, 이미 이를 알고 이해해주는, 나를 알아주는 친구 포숙과 같은 사람에게서만 기대할 일이다.

현대사회, 공교육을 통해 친구도 학교친구, 동아리 친구 양산체제다. 그 많은 친구가 모두 포숙이 될 수는 없다. ‘나를 알아주는 친구’가 그렇게 흔한 것이라면, ‘관포지교’가 오늘날까지 명언으로 남아있지도 못할 것이다. 단지 같은 해 졸업생에 불과한 친구에게 포숙의 도리를 기대하고 민폐행위를 저지르다간 체면만 바닥에 떨어진다.

인생 전환기에 접어들어, 너무나 기가 죽은 친구들이 많다보니 다소 처량해지는 얘기를 했다.

하지만, 뜻이 살아있으면 길이 열리는 법. 무엇보다 지난 50년 경험이 주는 깊은 지혜는 새로운 무기다. 지혜가 가장 큰 힘을 내는 것은 자기 스스로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돌이켜 볼 때다. 포숙은 그럴 때도 큰 힘이 되는 친구다.

또 하나, 지금 한 때 어려운 처지의 관중이 된 친구는 없는지 살펴볼 일이다. 내가 그에게 진정한 포숙이 될 기회는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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