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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F 위기' 금 모으기와 효종의 북벌은 닮은 데가 있다
'IMF 위기' 금 모으기와 효종의 북벌은 닮은 데가 있다
  • 장경순 기자
  • 승인 2018.12.13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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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없는 국난에 장롱 속 금반지는 어떤 역할을 했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엄청나게 수명이 긴 사람이 2097년에도 살아서 역사교과서를 보게 됐다.

“1997년의 한국인들은 국가를 부도위기에 빠뜨리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는 문장 다음에 “더욱 한심한 것은 전대미문의 국난에 ‘금 모으기’와 같은 원시적 대응만 했다”고 적혀 있다.

지금 살아있는 한국사람 중 누군가가 만약 이런 일을 겪게 된다면, 100년 전을 살아본 노인으로서 대단히 섭섭함을 느낄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극히 일부에 그친다고 확신한다.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 직후의 ‘금 모으기’ 운동은 실제로 얼마의 금이 모였느냐보다 이런 국민적 운동이 벌어진 자체가 더 큰 의미였다.

한마디로, 한국에 돈을 빌려줄까 고심하는 채권자들 입장에서 계량경제적인 통계숫자가 보여주지 못하는 더 큰 신뢰를 한국인에게서 찾은 것이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예전에는 ‘보불전쟁’이라고 불렸다) 패전 후의 프랑스 사람들 비슷하게 묘사됐다.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에게 패배한 나폴레옹3세의 프랑스는 가혹한 배상금을 독일에 지불해야 했다. 프랑스 국민들은 배상금 지불을 위해 신혼부부도 금반지를 기부하며 ‘불명예를 씻자’는 열정을 보였다.

가격결정의 수요공급법칙으로 따지면, 1997년 한국의 ‘금 모으기’는 무모한 면도 있다. 국제상품시장에 금 공급을 늘리면서 금값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대미문의 국난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서 더욱 중요한 것은 국가적 에너지다. 인구가 몇 백만 명 정도가 아니라 당시 이미 4500만 명을 넘은 한국에서 국민들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간단명료해야 한다. 아무리 평균학력이 높아도 인구 1000만 명을 넘으면 정치메시지는 한 줄에 그쳐야 한다. 문장 하나가 추가될수록 1000만 명에 대한 전달력이 떨어진다.

‘금을 모아서 경술국치 이후 최대 불명예를 씻어내자’는 단 한 줄은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서울 대치동에서 열린 금모으기 행사에 1 kg 짜리 금괴 95개가 접수된 모습. /사진=뉴시스.


냉정하게 따지면 어리석지만, 결과적으로 큰 역할을 해낸 역사의 사례는 또 있다.

조선시대 효종 때의 ‘북벌론’이다.

병자호란에 이은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청나라 심양에서 인질생활도 해 본 적 있는 효종의 청나라 정벌 움직임이다.

북벌 추진세력들의 근본적 사고방식은 고구려 영토 회복을 외치는 오늘날 사람들의 기대와는 크게 거리가 멀다. 북벌론자들은 오랑캐로 여긴 자들에게 항복을 한 오욕의 역사를 설치하고,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중화임금을 복위시켜야 한다고 설파했다.

이들은 “오늘과 다른 때를 기다려”, 즉 청나라 기세가 누그러졌을 때를 기다려 북벌에 나선다는 방법론도 제시했다. 명나라 개국태조 주원장이 “오랑캐에게는 100년 운이 없다”고 한 것처럼 중국주변 이민족 왕조는 100년을 못 넘기는 과거 사례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청나라는 이전의 오랑캐와 전혀 달랐다.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더욱 조선의 식자층들을 당혹시킨 건, 오랑캐답지 않게 이전 중국 천자보다도 공자의 왕도에 가까운 정치를 펼쳤다. 청나라를 거부하던 중국인들의 마음도 돌아서기 시작해 머리를 변발로 바꾸고, 한족 지식인들은 과거시험을 통한 출사에 나섰다.

효종의 북벌이 성공했더라도, 막상 북경에 들어서보니 전부 변발을 한 한족들이 “왜 왔냐”고 물어볼 지경이 됐을 것이다.

이렇게 군사적으로 효종의 북벌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통치의 관점에서, 북벌은 양대전란으로 피폐한 나라를 부활시키는 에너지를 가져왔다.

북벌을 통해 충실히 적립한 재정은 곧 이은 영조·정조시대 중흥기의 토대가 됐다.

오랑캐의 우두머리 칸이라고 부르던 자에게 세 번 절하고 머리를 아홉 번 조아린 조선임금의 권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임진왜란,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국방력은 완전히 거덜 났다. 가뜩이나 곳간이 텅 비었는데 패전에 따른 세폐의 부담까지 짊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즉위한 효종이었다. 그에게는 국정 반전의 계기가 절실했다.

처참하게 어려운 지경의 백성과 사대부들이 더욱 허리띠를 졸라맬 수 있는 희망의 제시가 필요했다.

남한산성과 수원근교 병영을 만들고 수천 군사의 훈련하는 함성이 점점 더 커졌다. 이제는 병자년처럼 맥없이 참패하는 일은 없을 것이란 믿음이 생겼다. 병사들이 먹을 양식도 곳간에 조금씩 늘어났다. 효종 이후 3종의 혈맥(현종, 숙종)시대를 이어 경종, 영조가 즉위했다.

오랑캐라고 불렀던 청나라에서는 유학뿐만 아니라 기하학도 알았다는 성조 강희제가 60년을 다스리고 또 다른 60년을 다스릴 고종 건륭제의 시대가 됐다. 북벌은 어느새 조선의 핵심 과제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용맹하게 조련한 군대는 건재했다. 아이러니하게 북벌을 위해 양성한 부대가 러시아와 국경분쟁을 빚는 청나라를 도우러 나선정벌에 나섰다.

이 군대가 북벌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도록 먹을 양식을 굳이 쌓아놓아야 할 필요가 없어지니 재정에 여유가 생겼다. 탄탄한 재정을 가진 왕은 자신 있게 과감한 정책을 폈다.

영정시대의 중흥기는 효종의 북벌에 경제적 토대를 두고 있다.

만약 오늘날 우리가 읽는 역사교과서에 “병자호란에서 참패하고도 조선은 국제정세에 어긋나게 ‘북벌론’과 같은 과대망상증에 빠져 있었다”고 적혀있다면, 국가를 부활시킨 효종에게는 한없이 서운할 것이다.

1997년의 ‘금 모으기 운동’도 마찬가지다.

전적으로 국가지도층의 관리 부실로 초래한 국난에서 사회 각 계층이 모두 혼비백산했을 때, 나라의 중심을 잡아준 ‘금 모으기’다.

사족. 그렇다고 ‘국가부도의 날’에서 ‘금 모으기’에 대해 섭섭한 평가를 살짝 자막으로 내보낸 것을 비판할 의사는 전혀 없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다. 영화의 각색이 사실 왜곡이라고 열 올리는 기자들은, 우선 자기 언론이 위기 당시에 보도는 제대로 했나부터 살펴봐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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