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위기' 종금사 비중은 '그 많은 직장 중 하나'가 아니었다

우선, 영화와 사실의 차이를 지적하는 얘기가 영화에 대한 비판이 아님을 또 한 번 강조한다. 창작예술인 영화에게 사실을 변형하는 각색은 생명력의 원천이요 본분이다. 비판의 대상 자체가 되지 못한다.

다만, 1997년 외환위기에 대해 평균이상의 많은 글을 쓰고 있는 기자 입장에서는 이 때 일에 독자들의 관심이 높아진 기회를 맞아 또 한 번 소상하게 당시 사정을 전달하고자 할 따름이다.

영화의 각색에 대해 왜곡이나 선동이라고 비판하려는 언론이 있다면, 그 이전에 위기당시에 언론은 스스로 본분을 다했는지 돌이켜 보는 일부터 앞세워야 한다. 갈수록 명백히 다가오는 위기를 외면하거나, 특히 선거와 관련한 정파적 속성 때문에 우리 스스로의 손발을 묶어 무고한 국민들의 희생을 방치하지는 않았는지, 정말로 심각한 자성을 이 때 역사가 요구하고 있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유아인은 종금사 직원이다. 그는 신입직원들을 인솔해 연수를 갔다가 외화제공을 중단한다는 해외 금융기관의 연락을 받는다. 유아인이 심각한 상황을 인식해 회사를 그만두고 축재의 귀재로 돌변하게 되는 계기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종금사는 영화에서 유아인의 처음 회사 정도 의미만 갖는다. 나중에 투자금을 몽땅 날린 고객들이 몰려와 울화통을 터뜨리는 장면에도 이 회사가 등장한다.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에서 종금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이렇게 하나의 업종에 불과한 정도가 아니다. 위기의 순간파괴력을 증폭시킨 주범으로 지목되는 게 종금사다.

영화와 현실의 첫 번째 차이는 해외금융기관이 종금사 직원인 유아인에게 전화를 걸어 투자금 회수를 통보하는 장면이다. 현실은 종금사가 해외에서 직접 자금을 조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종금사들의 신뢰도가 해외금융기관의 기준에 미달했다.

기준미달 정도에서 그치지 않고, 외국기관들은 멀쩡한 은행에 밀려주는 돈도 종금사로 가는 것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였다. 종금사가 외화를 빌리지도 못하니 만기연장 안한다는 전화를 받을 일도 없었다.
 

▲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유아인이 종금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사진=네이버 영화페이지.


종금사들은 스스로 외화조달이 안되니까 은행에 매달렸다. 온갖 영업방법을 다 동원해 은행이 빌려오는 외화를 자기들이 가져다 썼다.

그나마 1997년 하반기 되면 국책은행이 아닌 시중은행의 외화조달도 막혔다.

산업은행 머니마켓 팀은 단기자금시장에서 1주일짜리 자금을 계속 빌리고 만기연장했다. 그 때마다 이미 자금 제공약속을 받은 종금사가 바로 이 돈을 가져갔다. 1주일짜리 자금을 가져가는 종금사는 최소 3개월 이상의 장기로 투자하고 있었다.

산업은행에 자금을 제공하는 해외금융기관은 진작부터 “지금 빌려가는 돈은 종금사로 보내는 것 아니냐. 그렇다면 산업은행 가산금리가 아니라 종금사에 해당하는 가산금리를 내라”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정부와 신용등급이 같은 산업은행이라면 낮은 금리로 돈을 빌려줄 수 있지만, 실제 돈을 쓸 곳은 믿을 수 없는 종금사들이니 이자를 더 내야한다는 얘기였다.

종금사가 한국 역사에서 악역을 맡게 되는 것은 1년 전, 석연찮은 등장에서 시작된다.

투자금융회사, 즉 투금사와 달리 종금사는 외화영업을 허가받았던 곳이다. 한국 회사채 금리는 15%를 가볍게 넘기는 반면, 미국 금리는 6% 정도로 두 나라 금리격차가 10%에 가깝던 시절이다. 외화만 조달할 수 있으면 땅 짚고 헤엄치듯 영업할 수 있었다.

그래서 1995년까지 종금사는 금융업종의 숨은 강자였다. 은행원은 허울만 좋을 뿐이지, 진짜 좋은 직장 다니는 사람은 종금사 직원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직장도 제한된 경쟁자가 있을 때 얘기다. 1996년을 전후해 20여개의 투금사가 종금전환 허가를 받았다. 전체 종금사 숫자가 이전의 세배를 넘게 된다. 여기서부터 종금사의 비극이 시작된다.

투금사들은 종금사 ‘승격’을 창사 이래 숙원이 이뤄진 날로 여겼다. 이 숙원은 1년 후 업종전체가 멸종당하는 운명으로 이어진다.

종금사들의 투자는 앞서 언급한대로 투자기간의 불일치라는 치명적 약점을 갖고 있었다. 빌려오는 돈은 1주일짜리인데 투자하는 기간은 3개월이었다. 1주일 빚의 만기연장이 안 되더라도 이들은 투자자금을 그때그때 회수할 수 없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건, 갑자기 종금사가 급증하다보니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위험한 채권까지 마구 투자를 했다는 점이다. 이자를 더 주는 곳일수록 더 큰 투자위험이 따르는 것인데, 워낙 경쟁자가 순간 폭증하다보니 종금사들이 이걸 냉정하게 따질 겨를도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국회의 국정조사에서 1995~1996년 무더기 종금사 허가는 핵심의혹의 하나였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아무 것도 밝혀진 것 없이 국정조사가 마무리됐다. 종금사 허가 때문에 책임지고 처벌받는 사람도 없었다.

‘IMF 위기’의 원인 가운데서 은행들의 무분별한 기업대출과 그 무렵의 경상수지 적자는 한국 경제의 체질을 약화시킨 것들이다. 종금사의 난립은 약한 체질을 상처가 날 수 밖에 없는 곳으로 끌고 간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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