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오랜만에 경복궁을 갔었다. 한참 북쪽 끝으로 가다가 정말 오감으로 괴기가 느껴지는 곳에 발걸음이 멈췄다.

 
인근의 국가 중요시설을 경비하는 병력이 머물고 있었다. 음산한 기운의 정체가 바로 이들이었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이 글에서 얘기하려는 내용 때문이라고 주장할 자신은 없다.
 
한참을 둘러보니 작은 전각이 하나 있었고 그 앞에 있는 안내문을 읽었다. 명성황후가 왜인들에게 시해된 곳이었다. 시해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그림도 있었다.
 
을미사변의 그날, 어떤 일이 있었길래 100여년 후의 서생이 바로 그 때의 못 풀린 원통함을 지금의 예사롭지 않은 느낌으로 이어가려는 것인가.
 
29일, 경술국치 102년이 되는 오늘, 뉴시스에 그 때의 자세한 정황을 알려주는 기고문이 하나 올라왔다. 생전 처음 듣는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듣고 들을수록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많이 퍼뜨려야 하는 글이다. 조금 긴 글이지만 독자들께서 한번 읽어보고 이 글로 돌아오시기를 권해드리는 바다. (필자 주: 링크된 글의 저자가 갖고 있는 현재의 정치관까지 공유하시라는 얘기는 절대 아니다. 반대의 정치관을 가진 분들도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1895년의 일에 대해서 말씀 드리는 것이다.)
 
 
망극한 그날, 경복궁을 범한 왜인들의 가장 높은 자리에 한 사람의 조선인이 앉아있었다. 당시 국왕 고종의 생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다.
 
자기 며느리가 왜인들의 손에 무참한 난행과 참살을 당하는 그 자리에 이하응은 왜인들의 앞잡이가 돼서 입궁했다.
 
며느리의 시신은 침략자들의 손에 불탄 다음날, 이하응은 아내를 잃은 아들 고종에게 민 왕후를 폐서인하라고 다그쳤다.
 
그가 안동김씨로부터 어떻게 정권을 되찾아서 어떤 정책을 폈는지, 또 그런 것들이 우리 민족사에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따져볼 가치조차 있는지는 모르겠다. 어찌됐든 이하응은 외적의 침입에 홀로 맞선 여인이 무참한 죽음을 맞는 데 있어서 앞잡이로 쳐들어간 자다.
 
이러고도 그를 한국사의 위인으로 부를 것인가?
 
나 또한 중학생 시절, ‘운현궁의 봄’이란 소설을 읽고 극심한 역사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야... 대원군 같은 위인이 있었구나. 이 사람만 안 쫓겨났으면 우리나라가 식민지가 안됐을텐데.”
 
글이라는 것이 얼마나 악독하게 쓰일 수 있음을 나이 들어 깨달았다.
 
이 나라 왕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35년 동안 유린한 자들은 자기들의 입맛에 맞는 사고방식을 조선인들에게 주입하려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작태에 말려든 사람들이 아직도 이 땅에 존재한다.
 
‘민비라 불러서는 안되고 명성황후 또는 명성왕후라고 불러야 마땅하다’는 글을 쓰면 반드시 “꼴페미년”이라는 악성 댓글이 따라붙는다. (내용 전달을 위해 육두문자를 에둘러 쓰지 못하고 그대로 글에 옮기는 점에 있어서는 독자분들에게 깊이 사과드립니다.)
 
이런 사람들은 “민자영이 어떤 X인데...”라면서 참으로 상세한 역사기록을 올려놓기도 한다. 글을 참 많이도 읽은 사람들인가 본데, 그렇게 책을 많이 봤으면서 나라 망하는 마지막 순간 신식무기로 중무장한 외적 앞에 자신의 몸 하나 만으로 맞선 여인은 안보이는 모양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의 독도 방문을 계기로 일본 위정자들은 위안부에 대한 예전의 사과 조차 취소하려는 시국이다. 100년 넘는 세월동안 여전히 이하응을 떠받드는 한국인들이 극우 일본인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만약 이하응이 왜적 앞잡이 노릇을 할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변명한다면, 이완용 또한 나라를 팔아먹어야 할 사정이 있었다고 강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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