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노동법파동, 이미 IMF 위기와 무관한 딴전부리기였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 이란의 전설적 축구선수 알리 다에이는 1996년 아시안컵 한국과의 경기에서 네 골을 넣으며 6대2 대승을 이끌었다. 그가 2009년 이란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테헤란 아자디스타디움에서 한국과의 경기를 지휘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58] 무엇이 IMF 위기를 초래했나 (2)

노동법 파동이 정말 위기를 불렀을까?

알리 다에이라고 하면 웬만한 축구팬이 모두 기억하는 이란 축구선수다. 특히 한국 팬들에게는 1996년 아시안컵에서 한국전에서 4골을 넣어 2대6 참패를 안긴 선수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이 경기가 열린 것은 국회 ‘노동법 날치기 통과’ 파동으로 온 나라가 격렬한 정치폭풍에 휩쓸려 들어갔을 때다. 1990년 3당합당에 따른 민주자유당 창당에 대한 반대시위는 야당과 재야의 진보진영 중심으로 진행됐지만, 1996년의 노동법 반대는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처음으로 시민들이 반정부시위에 가세했다. 그만큼 집권당이 느끼는 부담이 컸다.

이란과의 축구경기 참패까지 정치풍자 소재가 됐다. 당시 문화일보 장군봉 만평에서는 노동법 뉴스를 보고 있는 남편의 얼굴이 분노로 시커멓게 변했다. 그러나 아내는 “이때만 해도 견딜만했어요”라고 말한다. 다음 장면 축구 참패 뉴스를 접하자 남편은 마침내 TV를 창밖으로 던지려하고 아내는 “안돼요. 월부도 아직 안 끝났어요”라고 말리고 있다.

1996년이 다 가기 전, 그리고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가 오기 전의 마지막 정치 격변이 노동법파동이다.

그래서 IMF 위기와 노동법 파동은 늘 연장선상에 있는 사건들로 거론된다.

하지만, 노동법 파동은 IMF 위기를 막을 수 있었느냐는 논의와 전혀 무관하다는 것이 현 시점에서의 판단이다.

그래서 IMF 위기 원인으로 3번이 아닌 2-1번의 번호를 준다. (앞선 글에서 시간의 역순에 따라 1번은 한보·기아부도 위기, 2번은 외환시장 선물환 개입으로 소개했다.)
 

2-1. 1996년 12월 노동법 파동

설령 이 때 여야가 원만하게 합의를 해서 노동법을 처리했다고 가정해도, 1997년 외환위기 진행 상황을 막을 방법은 여전히 막막해 보인다.

앞선 봄에 무더기로 탄생한 종금사들은 1주일짜리로 빌리는 미국 유럽의 달러자금을 싹쓸이해서 동남아시아 러시아와 같은 신흥국에 3개월 단위로 투자하고 있었다.

무슨 일만 생기면, 신용불량과 기간불일치 문제가 한국의 금융을 무너뜨릴 상황이었다. 바꿔 말하면, 무슨 일이 안생기면 이런 위험한 상황을 모르고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너무나 확실한 ‘무슨 일’이 해가 바뀌면 터져 나올 채비를 다 갖춰놓고 있었다. 한보부도다. 곧이어 기아부도위기가 뒤따르게 된다.

한보부도는 한국의 은행들이 전혀 위험관리가 안됐음을 드러낸다. 연이은 기아부도는 그나마 은행들이 믿고 돈을 빌려주는 한국의 전통재벌들조차 위험투자대상으로 국제금융시장에 낙인찍는다. 지금까지 11대 경제대국 한국을 구성해온 전제조건들이 해가 바뀌면 모두 무너지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시장을 손질한다는 것이 11개월 앞으로 다가오는 외환위기를 막을 수는 없다. 11개월이 아닌 11년 후의 외환위기를 막아줬을 지는 모른다. 그것도 국가적인 합의가 제대로 이뤄졌다는 전제에서다.
 

국민적 합의라도 제대로 이뤘다면...

객관적이고, 상식적 입장을 한 치도 벗어나지 않고 얘기해도, IMF위기는 국가관리 엘리트, 좀 더 꼭 집어서 말해 당시 집권세력의 책임이다.

너무나 엄청난 민족적 고난을 초래하다 보니 여태껏 제대로 반성하고 해명하고 사과하는 용기도 못 내고 있다. 궁여지책으로 일부 극단적 지지자들의 입을 빌려 “야당이 반대한 때문”이라는 억지 변명이 나오기도 한다.

여당이고 야당이고 정치에 절대선은 없다. 하지만 당시 현실을 살펴보면 야당인 새정치국민회의(지금의 더불어민주당)는 국민의 신뢰를 크게 잃은 상태여서 뭘 앞장서서 선동하고 반대할 기력도 없었다. 1996년 5월 총선에서 얻은 의석이 겨우 70석이다. 과반수커녕 개헌저지선인 100석조차 꿈도 못 꿀 형편없이 초라한 평가를 받았다. 특정인의 대통령선거 출마를 위해 무리하게 제1야당을 분당했다는 비판을 받아 전통지지층마저 무수히 이탈했던 결과다.

노동법파동은 야당의 정치 전략이 먹혔다기보다, 그동안 노동운동을 남의 일 보듯 했던 ‘월급쟁이 중산층’의 저항을 초래했던 것이다.

노동 개혁을 이때는 못했지만, IMF위기로 인해 강제적으로 상당부분 도입하긴 했다. 그래도 여전히 노동시장 유연화는 지금도 한국 경제가 해결해야 하는 과제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지금 옳은 일을 그 때 반대한 국민들이 나쁜 사람들일까. 오로지 노동개혁만이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면 이를 반대한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쉽게 단정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곧 드러나게 되듯, 이 때 한국의 문제는 금융, 산업정책 등 전 분야에 걸쳐 있었다.

대수술이 필요한데, 그런 건 다 놔두고 오직 ‘월급쟁이 쉽게 자를 수 있는’ 개혁만을 국가과제로 밀어붙였다. 금융 분야부터 도입한다고 해서 은행원들이 점심 먹고 은행별로 조를 나눠 탑골공원 앞으로 가서 모일 계획도 등장했다.

국민이 내 영역부터 고통을 감수해서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오도록 앞장을 서기위해서는 위정자에 대한 신뢰가 필수다. 만약 위정자가 내 세금으로 자기들 뱃속만 채운다는 불신이 가득하거나, 청렴하긴 해도 심각하게 무식하다면 그 나라는 ‘나부터 고통을 감수하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는다.

솔선수범하는 국민성은 한국인들이 세계적 모범이란 사실을 이로부터 1년 쯤 지난 ‘금 모으기 운동’이 여실히 보여준다. 금 모으기에 나서는 이런 국민들을 1996년의 집권세력은 제대로 설득하고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금 모으기’의 국민적 에너지, 왜 1년 일찍 나오지 못했나

금 모으기 자체는 금값 변동의 원칙을 거스르는 무모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들 돌반지까지 들고 나서는 한국인들의 모습이 재무학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신용의 상승을 가져왔다.

마찬가지로, 이미 때와 맥락을 잃은 노동법 개정이지만, 이것이 국민 대다수의 합의를 중시하며 이뤄졌다면 ‘금 모으기’와 같은 국민적 에너지가 좀 더 일찍 발휘되지 않았을까.

조만간 어떤 무서운 일이 닥쳐올지 전혀 감지도 못하던 위정자들이다. 국민들은 정확한 지식은 없어도 5000년 역사를 이어온 누적경험으로 이런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의 신뢰를 줘야 되는 지를 잘 알고 있다. 그게 바로 한국인들의 저력이다. 세상 돌아기는 일에 깜깜하고 고신분고의무 정신도 전혀 보이지 않는 위정자들이 서민의 고통전담만 강요했지만 국민적 저항만 초래한 것이 1996년 12월 노동법 파동이다. 당시 언론은 법이 통과된 후 주요기관 경비가 강화됐다는 소식도 전했다.

이 파동은 정치표심이 급변한 계기가 됐다. 기존 집권엘리트에 대한 불신이 현실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총선에서 70석으로 몰락한 정당이 1년 만에 집권당이 된 근본 이유다. 1997년 대통령선거의 DJP연합, 여당후보 아들 병역문제, 여당 표의 분산이 50년만의 정권교체 이유로도 거론된다. 하지만 한국정치를 분석하는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런 요인들은 이미 꿈틀한 표심의 명분을 주는 계기들일 뿐이다.

바꿔야 할 때라는 국민적 인식이 형성되면 한국인들은 그에 따라 더욱 열성적인 표심을 갖거나, 오래 지녀온 자신의 표심 행사를 생략한다. 모든 국민이 특정세력 고정표 같은데도 선거결과가 때마다 바뀌는 것은 이런 이치다. 1997년 정권교체는 알리 다에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물론 그의 4골도 극소수에게 변심의 계기는 됐을지 모른다.

위기를 초래한 3번 요인 종금사는 다음 글에서 다룬다.

 

[59회]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3)] 1996년은 마지막 기회였다

[57회]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1)] 1997년 봄에 벌어진 일들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첫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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