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부가가치 내수 가능한 시장이 생겨야 성장의 차원을 높인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30년 전인 1988년 서울올림픽 때, 매일 저녁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한 일대에서 화려한 공연이 벌어졌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볼 것을 다 본 서울시민들은 차분한 표정으로 차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보다 14년이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을 개최할 때는 88올림픽에 비해 정부가 이곳저곳에 노는 판을 만들어놓는 게 크게 적었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다 참가하는 올림픽과 32개국만 참가하는 월드컵의 차이 때문이기는 할 것이다. 노는 판은 줄었지만, 한국인들이 잔치를 누리는 방법이 달라졌다. 그냥 길거리 아무 곳에나 모여 마음껏 소리 지르고 응원했다. 이 길거리응원은 한국의 토산품처럼 세계로 퍼져나갔다.

30년 전 프로야구 관중들은 이기는 날이 돼야 응원단장의 지시에 따라 아리랑목동을 신나게 부를 수 있었다. 지금의 관중들은 17대2로 지는 경기에서도 마치 록 콘서트를 보러 온 사람처럼 흥이 넘치게 놀다가는 법을 터득했다.

약간의 계기만 있어도 신나게 노는 법을 아는 한국인이 됐다.

가만히 살펴보면, 요즘 한국 사람들이 노는 법에는 더욱 ‘기특한(?)’ 면이 있다. 별로 돈을 쓸 필요가 없다. 넉넉한 장소에 사람만 충분히 모이면 된다.

사람들은 돈을 쓰지 않는 방법으로만 노는 방법을 알고 있다. 기업이 끼어들어 뭔가 크게 장사할 만한 소재가 없다.

 

전통의 선비같은 관점으로 보면, 삼성은 2012년 애플과의 특허분쟁이 억울하기 이를 데 없다.

삼성이 만드는 제품은 기술적으로 애플에 뒤질 것이 없었다. 애플 조립과정을 몰래 알아냈거나 애플의 부품을 도용한 것도 아니다.

단지 모서리가 둥그렇게 처리된 것, 그리고 손가락으로 화면을 키우는 줌인 방식을 따라 쓴 것이 빌미가 됐다.

이런 건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애플이 먼저 생각해낸 것 뿐이다.

삼성의 우수한 전자부품을 만드는 데는 대학, 또는 대학원 이상의 기술지식이 필요하지만, 애플이 먼저 생각해낸 줌인 방식은 유치원생이 드러누워 스마트폰을 만지다가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지식적으로 별것 아닌, 조금 더 편리한 방법을 생각해 낸 것 때문에 애플은 삼성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배상금을 받아냈다.


요즘 인류경제가 돌아가는 모습은 20세기와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명문대에서 공부를 한 박사들이 기술을 개발하고 그걸 활용한 제품이 새로 나오면서 경제가 발전했다.

지금은 무조건 수준 높은 과학지식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다. 그게 쓸모가 있는지 다수 대중이 판단하는 게 더 중요하다.

사실 2000년대 들어 새로 나온 얘기는 아니다. 1991년 해외 컴퓨터과학은 이미 사용자 친화(user familiarity)가 학문의 핵심이 될 것을 예견했다.

특별한 목적 없이 하루 종일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는 게 할 일 없는 사람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추세를 예지해 주는 사람이 된 것이다.

새로운 제품이 나오면, 너도나도 그 제품을 사서 쓰면서 사회적 행동양태와 심지어 문화까지 바꿔야 제품을 만드는 기업은 다음 필요한 기술의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됐다.

다시 말하면, 새로운 기술로 제품을 만들어 낼수록 그걸 빨리 소비해 주는 탄탄한 내수시장의 존재가 경제발전에 핵심이 됐다. 단지 제품의 시장으로서만이 아니다. 앞으로 기술을 어떤 식으로 개발해야 되는지 판정을 내려주는 가이드로서도 자체의 내수시장이 중요해졌다.

한국 경제가 1960년대 ‘한강의 기적’ 시대 이후 지금도 여전히 부족한 게 바로 이 치열한 ‘내부 리그’다.

요즘 잘 나가던 애플도 해외 전문가들로부터 “아이폰에는 더 이상 혁신이 없다”는 지적을 듣곤 한다. 이들은 왜 혁신을 애플에게서만 기대하는가.

애플과 함께 오늘날의 기술문명을 대변하는 양대 기업이 삼성이다. 그런데 왜 삼성에는 혁신의 기대를 덜 거는가.

현대자동차의 최근 부진은 SUV에 대한 열풍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급세단에 너무 오래 집착한 때문이란 지적이 일반적이다.

여전히 유효한 수출입국이란 구호와 함께, 항상 주요 시장을 내 앞마당이 아니라 저 멀리 머나먼 곳에 두고 있는 한국 기업들이다. 진정으로 시대가 원하는 제품이 뭔지 헤아리는 것에서부터 앞을 못보고 코끼리를 더듬어야 하는 불리함이 있다.

한국이 세계 11대 경제대국이 되기까지는 늘 선진국의 새로운 기술을 배워서 그걸 국제시장에서 틈새를 노릴만한 우리만의 제품을 내놓는 방식을 주로 써왔다.

그 방식은 이제 여기까지다. 이제 한국 역시 세계 시장에서 혁신을 선도해야 할 위치다. 그래야 지금의 지위가 유지된다.

그럼 무슨 혁신을 해야 하나. 바꿔서 말하면, 사람들에게 새롭게 큰 도움이 될 변화가 무언지를 생각해 내는 거다.

한국 경제가 신흥국 단계에서 혁신을 선도하는 단계로 도약하기 위해서 필수적이다. 자체의 내수시장이 더 큰 부가가치 상품을 소화해 주도록 격상되지 않는다면, 한국의 경쟁력이 신흥국 단계에서 더 이상 도약하기 어렵다.

소득주도 성장론이 만약 제대로 방향을 잡고 있다면, 이러한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어야 한다. 여기에 정치적 담론이 끼어들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런데 소득주도 성장의 첫 번째 이슈가 ‘최저임금 1만원’이 되고 말았다. 지속적 발전 토양을 위한 ‘내부 리그’의 개척보다 노동정책의 가시적 성과에 더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소득주도 성장은 알바시급 인상에 그칠 일이 아니다

만약 소득주도 성장의 본질이 임금개선에 있는 것이라면, 한국 경제의 차원을 격상시킨다는 기대는 접는 것이 좋다. 저소득 노동자들의 소득을 올리는 것으로는 의미가 있지만 거기까지다. 거시경제의 판을 바꾸자는 얘기는 아니었던 것이다.

소득주도 성장을 해 나가는 방법에서 최저임금의 상승도 분명히 일부가 된다. 물론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런데 굳이 1만원이나 9000원 같은 목표를 제시하지 않고, 기존의 최저임금법 준수만 철저히 강조했어도 임금은 상승하게 돼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임기 중이던 2015년, 혜리의 ‘알바 광고’ 소동이 있었다.
 

▲ 알바 시급 5580원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2015년 광고. /사진=알바몬 광고 화면캡쳐.


혜리가 광고에서 최저임금 준수를 강조하자 소상공인들이 반발하는 행동에 나섰다. 하지만 이들의 반발은 ‘법도 안 지켰단 말이냐’는 역풍을 맞았다.

1만원커녕 시급 5580원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게 당시 현실이다.

이런 시장상황에 덮어놓고 1만원을 들이대니 상인들은 그저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돼버렸다.

경제정책을 이렇게 조심성 없이 운용해서는 절대로 성공할 수 없다.

그리고 최저임금과 같은 제도는 그 자체로 시장의 수요와 공급에 따른 가격결정 메카니즘을 저해하는 속성이 있다. 법의 명령에 따라 가격을 강제하는 제도는 가격 메카니즘이 순조롭게 잘 돌아가도록 하는 ‘양념’의 역할이 강조돼야 한다. 이러한 강제명령이 시장을 움직이는 주(主)엔진이 되면 끝내는 시장을 망가뜨린다.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논의가 산으로 가는 또 하나 이유가 있다. 정부 방침을 견제한다는 논리 역시 정치 구호가 되고 말았다.


비판론자들마저 본래 취지와 방향성을 잃었다

초기에는 “소득주도 성장의 취지는 공감한다”더니 이젠 그런 말도 들어가 버렸다. 소득주도 성장 자체가 좌파발상이란 말까지 나온다.

말의 유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소득주도 성장은 나쁘고 성장주도 소득이 정답이라고도 한다. 2005년, ‘성장이냐 분배냐’며 당시 정권이 분배만 매달리고 성장을 외면한다고 비판했던 모습의 판박이다. 그런데 분배만 매달린다는 정권의 경제성장률이 5%대였다. 성장위주를 주장한 사람들이 국정을 맡고서는 따라가지도 못한 성장률이다.

어떤 정치인은 “저소득층 소득을 올려주면 중국 등 외국산 제품만 사서 경제에 도움이 안된다”고 발언했다. 저소득층 소득은 올릴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 오해되기 쉬운 발언이었다. 이 사람의 소신이라기보다는 당의 입장에 따라 주장을 펼쳐나가다 이런 말이 튀어 나온 것으로 보이긴 한다. 그러나 정부의 소득주도 성장론 허점을 짚겠다는 사람들이 그저 손쉬운 떡밥만 보이면 덮어놓고 물어버리는 경박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소득주도 성장이 무조건 나쁘다면 과연 무슨 대안이 있느냐다. 또 다시 철지난 747 식의 7% 성장론을 들고 나온 들, 9년 동안 믿었다가 실망했던 국민들이다. 무엇보다 잠재성장률 3~4%를 논하고 있는데,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여전히 7%를 들고 나왔던 자체가 국민을 너무나 만만히 보는 소행이었다.

예전과 달리, 하고 싶은 것 놀고 싶은 것을 다 해보는 한국인들이 됐다. 이들의 새로운 행동패턴을 향상된 소득이 뒷받침된다면, 그 때서야 놀기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새로운 문화에 기업들이 제 역할을 찾아서 맡을 수 있게 된다.

한국인들의 창의력은, 축구경기 심판들이 쓰는 하얀 스프레이 이상의 것들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다.

새해의 소득과 성장 논의는 정치구호를 모두 지워버리고, 경제의 차원을 진정으로 높이는 방향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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