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보증, 대마불사 등 위기를 극대화시킨 당시의 금융세태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61] 무엇이 IMF 위기를 초래했나 (5)

‘한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1960~1970년대 고도성장에서 실물산업과 비교하면 금융부문은 사실 이렇다 할 기여도가 없다. 두 자릿수의 고도성장을 하는 경제에서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은행은 정해진 몇몇 회사에만 돈을 빌려줘도 충분히 돈을 벌 수 있었다. ‘리스크 관리’같은 건 염두에 둘 필요도 없었다.

또한 돈을 빌려주는 사실상의 결정이 국가적으로 이뤄졌다. 은행원이 돈을 빌려주면서 위험에 대한 책임을 질 필요도 없었다.

한국의 은행은 대기업 위주로 돈을 빌려주면 저절로 이익이 남는 ‘땅 짚고 헤엄치기’ 세월을 보냈다.

이런 풍토에서 ‘금융은 철저하게 숫자의 산업’이라는 교훈을 깊게 새길 필요도 없었다.

금융은 본래 철저히 작은 이자, 그리고 더 많은 이윤을 선택한 사람이 승리한다. 철저히 작은 이자라는 말에는 위험을 숫자로 바꾸는 기술이 포함돼 있다.

그러나 한국인들에게는 ‘숫자의 속성’을 저해하는 심성이 하나 있었다. 온정주의다. 지금도 일부 남아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 전에는 더 했다. 결과적으로, IMF 위기를 겪으면서 온정주의를 금융적 원칙으로 뿌리칠 수 있는 민간의 분위기가 마련됐다.

IMF 위기는 철저히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초래한 국난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하지만 이번 글은 위정자들보다 서민들이나 금융풍토의 허술했던 점을 얘기한다. 이번 글에서 지적하는 문제는 IMF위기의 핵심요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위기를 국민 개개인에게 파급시킨 주요인이라고 할 것이다.
 

▲ 기내식 사진. (기사내용과 무관함.) /사진=뉴시스.


7. 대마불사

은행들은 대기업에만 돈을 빌려줘도 운영할 수 있던 나머지, 대기업 대출 아닌 다른 영업은 거의 꿈도 꾸지 못했다. ‘서민에만 문턱 높은 은행’이란 말이 이래서 나왔다.

IMF 위기 1년 전, 은행권에서 들은 얘기다. 5대 재벌 그룹 계열사 한 곳이 은행대출금을 중도 상환했다. 이 은행의 부부장이 이 회사 재무담당 임원에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쳤다.

“당신들이 누구 덕택에 오늘날 재벌이 됐나. 상환하고 싶으면 이 회사뿐만 아니라 그룹대출금 전부를 상환하라”며 중도상환을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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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절대 안 망하고, 따라서 재벌대출만 하는 은행도 절대 안 망한다.’

‘숫자의 산업’을 외면한 한국의 은행업은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이 믿음을 균열낸 것이 한보와 기아사태다. IMF 위기와 함께, 심지어 삼성그룹마저 삼성자동차의 수렁에 빠졌다. 이어서 대우그룹이 1999년 해체됐다. 다음해는 현대그룹의 위기였다.

순식간에 은행업은 재벌대출 비중이 작은 곳일수록 강자가 되는 세상으로 뒤집어졌다. 대기업대출은 대손충당금을 더 많이 쌓아야 되고 자본구조가 나빠져 퇴출대상으로 몰릴 위험까지 몰고 왔다. 은행들이 안전한 영업대상을 찾다가 개인택시 대상 담보대출에 혈안이 되는 시기도 있었다.

대기업 대출보다 서민대출, 또는 우량 중소기업 대출이 많아서 ‘은행 같지 않은 은행’취급을 받은 곳들이 있다. 국민 주택 신한 하나은행 등이다. 오늘날 4대 금융 가운데 3강을 이루는 은행들이다. 이 은행들이 ‘서민은행’ 또는 ‘후발은행’의 처지에서 정상의 ‘우량은행’으로 상황을 역전시킨 계기가 IMF 위기다. 위험을 숫자로 바꾸는 법을 남보다 더 철저하게 연마하고 실천했던 은행들이 이뤄낸 역전극이다.
 

8. 맞보증... 내 빚은 네 빚. 네 빚은 내 빚.

국제통화기금(IMF)이 구제금융의 조건으로 강요한 것 가운데 가장 큰 실수가 고금리로 지적받는다. 고금리를 통해 국제자본을 한국에 묶어두는 효과는 미약했던 반면, 치솟는 이자는 무수한 서민들을 죽음과도 같은 상황으로 내몰았다.

은행돈을 끌어서 땅이나 다른 자산에 투자하는 것이 예전에는 훌륭한 투자였는지 몰라도, 금리가 치솟은 1997년 이후는 자멸의 길이 됐다.

그나마 이렇게 망한 사람들에게는 시운이 안 맞았다는 동정의 여지가 있다.

서로서로 빚보증을 서면서 대출을 받은 사람들은 함께 망하는 길을 피하지 못했다. A는 B의 보증을 서고, B는 A의 보증을 서서, A와 B가 모두 대출을 받았다.

그런데 이자가 솟구쳐, A는 원금커녕 이자 갚기도 힘들어졌다. 더 큰 문제도 닥쳐왔다. B 또한 자기 이자를 감당 못한 나머지 그만 도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금융기관은 B의 대출금을 보증인인 A에게 갚으라고 독촉했다. A는 자기 빚만 갚는다고 다 끝나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B의 대출금도 갚아야 하는데 자기 빚도 못 갚을 지경이었다. 마침내 A도 도망가 버렸다.

‘한국인 가운데 90%는 6촌 이내 도망간 사람이 있다’는 말이 이래서 나왔다.

고금리를 덜컥 받아버린 위정자들의 한심한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지만, 보증을 남발한 민간의 행태도 언젠가는 근절돼야 할 일이었다.

어느 집이나 ‘보증 설 바엔 돈을 빌려주고, 돈을 빌려줄 바엔 아예 그냥 준 걸로 여기라’는 어르신의 가르침은 훨씬 오래전부터 있었다. 이런 교훈을 망각한 사람들에게 IMF 위기는 너무나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교훈이 추가된다. 맞보증을 선 사람들이 모두 다 회생을 못한 것은 아니다. 급속도의 위기회복 과정에서 꿈같이 되살아난 사람들은, 미련하고 바보같이 ‘남의 빚’까지 꾸역꾸역 갚았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 가슴속엔 커다란 응어리가 남게 됐다.
 

9. 영어도 못하면서 기내식 먹는 맛에 국제금융맨?

IMF 위기가 오기 전, 한국 경제가 강조했던 것이 ‘세계화’다. 금융시장은 단계적 자본자유화를 해 나갔다. 은행에서는 ‘국제금융’ ‘국제영업’ ‘국제업무’ 등 ‘국제’로 시작하는 부서가 가장 인기 높은 곳이 됐다.

너도나도 국제부서를 가기 원하면, 최후의 승자는 ‘빽이 쎈’ 사람이 됐다. 비서실이나 인사부에서 근무한 인연으로 윗분들과 친해졌거나, 집권층 사돈의 팔촌과 어떻게 연줄이 닿아 그 힘으로 국제부서로 옮겨가 일 년에 서 너 차례 해외출장을 가고 뉴욕지점에서 근무하게 됐다고 친척과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한마디도 못한다는 것은, 은행이 정식 국제금융 인력으로 채용한 후배직원의 기준에서다. 아직은 인맥 학맥에 때 묻지 않은 이 후배는 “영어도 못하는 아무개 대리가 왜 국제금융부에 있는지, 당초에 국제부서 지원은 왜 했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했다.

영어대화도 안 되는 사람이, 짧은 영어로 외신에서 주워들은 얘기 한 두 마디를 근거로 투자결정을 내렸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은행내부 보고서만 그럴듯하게 쓰면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국제 세미나에서 다른 나라 참석자들은 수 년 전 금융위기 때 경험을 얘기하는데, 그 때 인사부에서 인사철을 관리하던 한국 참석자는 대화에 끼여들 말이 아무 것도 없었다. 영어도 짧으니, 그저 웃는 얼굴로 듣는 척만 해야 했다.

낙후된 한국 금융에서 독학을 하면서 국가적 국제금융 능력을 키워낸 은행원들도 분명 있지만, 당시 은행 금융부서에는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IMF 위기 이후 은행권의 서열이 재정립될 때, 몇몇 은행들의 국제 업무 능력이 취약하다는 것은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사족. 국회의원이 외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대사관 직원보다 이곳 해외지점 은행원이 먼저 달려와 이 의원을 모셔가 극진히 대접하면, 의원이 귀국한 후 서울의 은행장으로부터 아낌없는 칭찬을 듣던 것이 1990년대의 풍토다. 하는 일 없는 해외근무 특혜를 받았으니 이런 거라도 해야 된다는 게 그 시절의 인식수준이다. 금융은 그 나름 치열한 전선이라는 의식이 전혀 없을 때 얘기들이니 지금은 완전히 근절됐을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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