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안가는 인도 연수 자원해 색다른 경험, 1개월간 인도문화 체험

이쯤해서 잠시 재산관리국 시절 있었던 얘기를 하나 더 소개하고 넘어가야겠다.

한 달간 인도에 연수를 다녀온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남들이 아무리 외면하는 일이라도 그것을 하게 되면 의외로 얻을 게 많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인도 연수가 그랬다.
 
당시 UN아시아개발행정센터(ACDA)에선 재무부 공무원 1명에게 1개월짜리 인도 하이더라바드(Hyderabad) 대학원 세미나에 보내 준다는 공고를 내걸었다. 그러나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어 내가 자원했다. 비록 1개월짜리 비인기 지역 연수였지만 뭔가 배울게 있을 것만 같았다.
 
당시만 해도 인도를 가는 길은 멀고도 불편했다. 직항로가 없어 싱가폴을 거쳐 인도 동남쪽 항구에 위치한 마드라스(Madras) 공항으로 간 뒤 거기서 또다시 하이더라바드행 비행기로 갈아타야 했다.
 
당시 한국도 못사는 나라였지만 인도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마드라스에서 하이더라바드로 가기 전 잠시 식사나 할 겸 해서 5성급 호텔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데 차량 밑바닥이 뻥 뚫려 있어 흙먼지가 튀어 오르는 바람에 입고 간 옷을 다 버렸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기도 했다.

그 뿐 아니다. 호텔에 도착해 비프스테이크를 주문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어리석은 ‘미스테이크(실수)’였다. 호텔 종업원이 비프스테이크가 있다고 해서 ‘미디움 웰’을 주문했고 잠시 후 엄청난 크기의 스테이크가 내 앞에 놓여졌다. 그런데 아무리 자르려 해도 칼을 받아주지 않았고 아무리 씹으려 해도 이가 들어가지 않았다.
 
그제서야 그 비프스테이크가 ‘물소고기’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랬다. 인도는 힌두교를 믿는 나라여서 쇠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는데 그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스테이크를 시킨 게 화근이었다.
 

▲ 물소는 초식동물 중에서도 특히 강한 동물이다. 사냥에 잘 나서지 않는 우두머리 숫사자도 물소 사냥에서는 가족들을 도우러 나선다. 그만큼 물소 사냥이 어렵다는 얘기다. 또한 몸집이 커서 일단 사냥이 성공하면 누우와 같은 영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많은 고기를 얻어 큰 무리를 부양할 수 있게 된다. 사진은 사자가 물소에게 쫓기고 있는 내셔널지오그래픽 다큐멘터리의 장면.
     
 
불편한 건 이것만이 아니었다. 마드라스에서 하이더라바드로 갈 땐 수속절차가 워낙 엉망인지라 천신만고 끝에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물론 연수를 끝내고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 상황이 재연됐다.
 
그러나 인도는 나를 결코 푸대접만 하지는 않았다. 하이더라바드 대학원의 센(Sen)원장이 나를 몹시 반겼다. 그는 나와 네덜란드 왕립사회과학원(ISS)동문이라고 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일명 ‘AK Sen 이론’으로 불리는 ‘황금의 성장률“이라는 경제이론을 주창한 인도 경제학자 AK Sen 박사의 집안이기도 했다. 내가 센 원장에게 AK Sen의 경제발전이론을 배운 적이 있다고 하자 자신 또한 ISS출신이고 AK Sen과는 집안이라며 나를 각별히 챙기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의 숙소 생활도 대만족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종업원이 찰싹 달라붙어 풀서비스를 제공했다. 내가 한쪽에서 세면을 하면 그 사이 인도인 종업원은 침대며 방정리를 끝내놓고 있었다. 인도에는 4대 계급이 있었듯이 마치 내가 최고의 계급이 되어 하위계급인 종의 시중을 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런 생활은 한달 내내 계속됐다.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보니 서비스 인력 또한 넘쳐나는 듯 했다.
 
한가지 불편한 것이 있다면 도마뱀과 음식이었다. 숙소엔 늘 도마뱀이 여기저기 출몰해 있었고 식당에선 항상 카레와 양고기를 대접했다. 이 음식은 한 5일쯤은 먹을만 했는데 그 이후론 질리기 시작했고 한달이 지나 연수가 끝날 무렵이 되니 더 이상은 먹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수도중 대학원측이 며칠간 인도구경을 시켜준다고 해 아잔타 앤드 엘로라(Ajanta & Ellora) 지역에 갔는데 타고간 기차가 정차할 때마다 거지들이 몰려와 구걸을 할 정도로 당시 인도의 상황은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2차대전 때 영국군 장교가 말을 타고 사냥을 가다가 말 발굽이 푹 빠져 거기를 팠다가 발견 했다는 유적지는 가히 장관이었다. 서울 남산 크기의 5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면적에 칸칸마다 석굴암 불상보다도 큰 힌두교 신상들이 무수히 자리하고 있는 유적지를 보는 순간 탄성을 자아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들 거대한 유적지를 대하고 나니 “석굴암의 조그만 불상하나도 자랑하는 우리의 처지가 부끄럽고 오히려 인도사람들이 지금은 이렇게 없이 살고 있지만 문화와 종교적으로는 문명이 아주 발달한 나라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다시 대학원에 돌아오자 연수종료를 장식하는 인도 무희들의 댄스파티가 우리를 황홀하게 했다. 인도 남쪽은 주로 흑인들이 살고 북쪽에선 주로 아리아족이 살고 있는데 북쪽지역으로 갈수록 남자나 여자 모두 잘 생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눈은 새까맣고 동그랬으며 쌍카풀까지 가진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들 미인의 춤사위가 보통이 아니었다. 다만 샤리라는 인도 옷이 그들의 예쁜 몸매를 가리는 바람에 그들의 미모가 부각되지 못하는 측면도 있었다.
 
인도에선 또 사람이 죽으면 야전침대같은 당카에 시체를 그대로 눕힌채 이동하고 조문객들은 피리를 불고 춤을 추며 따라가는 모습이 경이로웠다. 물론 종교가 생활관습의 차이를 크게 한다는 것도 실감했다. 그들은 갠지즈강까지 시체를 옮긴뒤 화장을 한다고 했다.
 
일본 재무성에서 연수 온 공무원은 “이 세상에 인도만 없으면 세계의 가난이 없어질 것”이라고 업신여겼지만 내 눈에 비친 인도의 문화, 종교적 수준은 나름대로 상당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인도사람들은 순박하고 착했다. 내가 연수를 마치고 떠나올 때 연수기간 내내 나를 위해 수발들던 사람들에게 입던 옷가지를 선물로 나눠주자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 했던 일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한달 간의 짧은 연수였지만 볼거리도 많고 느낀 것도 많았던 의미있는 기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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