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에 적응 못한 민간, 탈권위시대 문란해진 관료의 책임이 더 컸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IMF, 실패한 보초병의 일기 62] 무엇이 IMF 위기를 초래했나 (6)

1997년 외환위기, 즉 ‘IMF 위기’의 원인들에 대해 지금까지 1994년 이후의 일들을 지적했다. 이 기간 종금사 난립과 같은 무분별한 정책에 미국이 금리를 두 배로 올리며 국제자금을 역류시킨 일이 겹쳤다.

은행이 무조건 재벌에만 대출을 하려고 매달리던 것과, 서민들 사이 보증에 대해 아무런 경계심이 없던 행태는 정책보다 금융풍속도에 관한 것이다. 풍토의 문제는 1990년대보다 훨씬 오래전에 불합리한 관행으로 자리 잡고 있던 것이긴 하다.

그렇다면, 1980년대 이전의 일들은 1997년 IMF위기와 무관한가.

이에 대한 논의는 정말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1987년까지 한국은 군사독재자가 26년째 통치하고 있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독재, 거기다 살인적 폭압이 더욱 극심했던 전두환 독재는 정치적으로 사회 도의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다. 독재체제는 경제적 성과는 인정받는 한편으로 비인간적 산업화, 산업구조의 왜곡을 초래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공과 과를 초월해, 객관적으로 분명한 것은 독재체제는 ‘시장경제’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경제를 이끌었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것이 1970년대 초의 사채동결이다. 국가기여도가 높은 기업들을 위해 사채를 동결한 일은 정상적 자본주의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늘날 당시의 사채동결을 비판하는 학자는 극히 찾기 힘들다. 정책의 ‘미학적’ 관점에서 보기 흉하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이러한 극단적 처방이 결과적으로 당시 경제에 훌륭한 돌파구가 됐다는 평가가 더 압도적이다.

이 시리즈의 핵심주제는 1945년 해방 이후 처음으로 주권의 침해를 초래한 IMF위기의 규명이다. 이번 글의 주제는 독재자들이 불의한 통치를 했고, 시장경제가 아닌 국가주도 경제를 한 것이 독재 종식 10년 후 외국에 지불할 달러가 바닥나는 이유가 됐느냐는 것이다.
 

▲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재임 중 모습. /사진=청와대.


나는 1997년의 결제외화 고갈 원인을 굳이 10년 전의 독재시대 정책에서 찾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 있다고 본다.

자본자유화와 시장경제 시대에 잘 적응할 체질을 미리 기르지 못한 ‘원죄적’ 책임을 거론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국가부도 위기가 이미 10년 전에 돌이킬 수 없게 됐다고 할 수 있을까.

원죄적 잘못도 있지만, 경공업 중심으로 출발해 점차 조선과 같은 중공업, 반도체 등의 첨단영역으로 개발을 확장해 나간 공도 있다. 그 과정에서 누적된 적폐를 청산할 것이 요구될 때, 이들은 권력에서 물러났다. 독재가 종식된 후, 국민소득이 3467 달러에서 1만3000 달러로 오르던 10년을 맡았던 사람들에게만 책임을 물어야 할 일은 분명히 있다.

시리즈에서 IMF 위기는 당시 위정자들의 국정관리 실패가 주원인이라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앞서 IMF 원인으로 지적한 가운데 1번 한보·기아 등 재벌경제의 위기, 7번 ‘대마불사’가 개발경제 시대와 관련이 깊기는 하다.

그러나 이것은 10년의 기간이 주어진 동안, 시장경제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과 금융 당사자들의 잘못이 훨씬 더 크다.

또한, 탈권위주의 시대에 접어들어 이전의 일사 분란했던 정책엘리트들, 즉 관료들이 부주의하고 정책적으로 문란했다고 비판한다. 무분별한 종금사 난립이 대표적이다.

이런 것들이 위기 10년 전에 이미 권력에서 쫓겨난 독재자들의 책임을 훨씬 압도한다.

아울러, 소득 1만 달러 시대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의 구호 속에 냉정해야 할 관료들까지 도취돼 각성제를 놓아야 할 사람마저 손을 놓고 말았다.

관련시리즈: [9회] 민간이 흥분할 때 官에서 말린다면, 官이 흥분할 때는 누가 말리나
 

덩달아 들뜬 관료들이 IMF 위기 직전 무수히 반복한 말이 “펀드멘털은 건재하다”였다. 난국에 처한 현실을 부정하는 이들의 만용이 무모한 외환시장 개입의 근거가 됐다.

관료들의 만용은 1996년 외환시장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그 이전 1989년에도 있었다. 그 때는 외환시장이 아니라 주식시장이었다.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증시부양에 나섰던 것이다.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전 정책 가운데 IMF 위기와 관련해 1989년 증시부양은 상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9.5 1989년 발권력을 동원한 증시부양

1989년의 발권력 동원이 IMF 위기 원인을 제공했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로 인한 투신사 부실은 위기 발생 후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에서 번번이 걸림돌이 됐다. 위기의 원인으로 10번이 아닌 9.5를 부여하는 이유다.

미약했던 한국의 주식시장은 1987년부터 국민적 관심대상이 됐다. 다음해까지 증시 호황이 지속되다가 1989년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집권 2년차를 맞고 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정부다. 증시가 활성화되면서 종합주가지수(오늘날의 코스피)가 국민들의 체감경제지표로 부각되기 시작했을 때다.

노태우 정부는 후임 김영삼 정부가 1996년 외환시장에서 보인 것과 똑같은 태도를 증시에서 보였다. ‘감히 정부의 낙관론에 맞서는 불순투기세력을 잡겠다’는 것이었다. 무제한의 발권력을 동원해 증시를 부양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결과는 권력이 시장을 이길수는 없다는 교훈을 처음으로 배운 것이었다. 이 교훈을 1996년 망각한 것이 안타까운 일이다.

무제한의 발권력 동원에 창구역할을 한 것이 투신사들이다. 이 때 생긴 부실의 청소는 2000년 이후에도 한참 지속됐다.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함부로 동원한 폐해가 이와 같다. 2016년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한국은행 발권력을 동원한 것을 계속 비판한 것은 이 교훈 때문이다.

‘IMF, 실패한 보초병 일기’ 속의 또 다른 작은 시리즈 ‘IMF 위기 원인’은 일단 이번 글로 마무리 한다. 과문한 사람의 글이다 보니 모든 원인을 다 언급했다고 감히 자신하지 못한다. 10년 전 글에 없던 것을 이번에 추가하기도 했다. 새롭게 공부가 된 것이 있으면, 그때 보완하기로 한다.

 

[61회]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5)] 영어도 못하면서 기내식 먹는 맛에 국제금융맨

[60회][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4)] 연준의 연속적 금리인상과 국제 투자자금 역류

[59회]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3)] 1996년은 마지막 기회였다

[58회] 1996년 노동법파동, 이미 IMF 위기와 무관한 딴전부리기였다

[57회] [IMF 위기, 원인은 무엇이었나 (1)] 1997년 봄에 벌어진 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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