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국적 따라 "검은머리 외신" 따지는 태도 또한 초라하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한국은행이 금융통화위원회를 개최하는 날, 공보실에는 평소에 안보이던 젊은 기자들이 들끓는다. 이들은 저마다 손에 전화기를 열어뒀다가 금통위 발표가 나자마자 “컷” 또는 “스테이” 등을 외친다.

외신기자들이다. 금통위 회의만큼은 전 세계 금융시장도 주목할 만한 일이기 때문에 이날은 외신기자들이 이렇게 몰려온다.

그런데 외신은 가득한데 외국인은 별로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쓰는 기사를 무슨 ‘일보’와 같은 한국 언론의 기사라고 하지는 않는다.

한국인이든, 중국인이든, 미국인이든, 기자 개인의 국적이 어디든, 그 기사는 해당 외신의 데스크 승인을 거쳐 전 세계에 공급되는 명백한 ‘외신’기사다.

기자국적이 한국인이라고 해서 ‘검은머리 외신기사’라고 표현하는 것은 저마다 전문분야에서 한국 언론에 크게 앞선 공신력을 가진 외신에 대한 심각한 모욕이다.

뭐든지, 한국 사람이 섞이면 품질이 떨어진다고 여기는 자학심리가 겻들인 것 같아서 더욱 불쾌하다.

금통위 발표를 기다리던 ‘한국인’ 외신기자들이 저렇게 짧은 말만 외치는 단순노동만 하는 것도 아니다. 외신을 읽어보면 이들은 때론 그날그날의 국제유가 동향에 대해 웬만한 국내언론의 심층 분석에 비견할만한 깊이 있는 기사를 작성한다.

취재원들의 외신기자에 대한 상대적 선호도 여전히 느껴진다. 외신기자한테는 밥을 산적이 없고 오히려 인터뷰 때 자기가 얻어먹었다는 사람은 내외신간 분명히 취재관행 차이가 크게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이런 마당에 ‘검은머리 외신’ ‘노랑머리 내신’을 따지는 것이 참으로 부질없고 구차하다.

그런데 이번 블룸버그의 ‘김정은 수석 대변인’ 기사 논란에는 더 시급하고 심각한 문제가 있다.

해당 기자가 “위협을 받았다”는 것이다. 외신기자클럽이 이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은 군사독재시대에도 개별 기자가 일신상의 위해를 받은 사례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1970년대의 동아일보 광고탄압, 1980년의 언론인 대량해직이 있었고, 말지와 같은 지하언론 기자들이 언론인 대우를 못 받고 시국사범 비슷한 탄압을 받은 일은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외신기자 성명은 더욱 눈길을 끈다.

다만, 정당의 성명서에 기자 이름이 언급된 것을 두고 위협으로 간주하는 것이 좀 와닿지 않는 면은 있다.

오늘날 기자들은 얼굴은 몰라도 이름은 다 드러내고 기사를 쓴다.

예전 어떤 갤러리에서 내 기사가 그날의 키워드가 됐다. 내 이름의 끝 글자만 보고 “페미X”이라는 욕설이 달리다가 잠시 후 누군가 “몇 살 먹은 남자기자야”라는 반론이 붙었다.

“누가 거리에서 장ㅇㅇ 보면 어떻게 좀 해봐”라는 댓글도 있었다. 만약 길거리를 가는데 태산같은 몸집을 가진 사람이 “당신이 장기자냐”라고 하면 어떡할 것인가. 갤러리에 공개된 아이피를 알아봤더니, SKY도 능가하는 최첨단 명문대학에서 올린 글이었다.

한국에서 3년 이상 기사 쓰면 누구나 겪는 일이다.

이런 것을 각자 관점에서 ‘위협’이라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는 정치가 불안한 나라에서 언론인이 실종·투옥되거나 공격을 받는 것과 같은 ‘위협’과는 분명히 다른 것이다.

‘위협’인지 아닌지보다 더 분명한 것은 정당이 굳이 기자 이름을 언급하는 치졸함이다.

내가 국회에서 어느 정당 대변인과 말다툼을 벌인 적이 있다. 진흙탕 말싸움으로만 끝나지도 않았다. 우리 회사 후배가 다음날 그 당의 언론브리핑에 갔을 때 “장ㅇㅇ 기자 회사 아니냐”면서 당직자를 시켜 후배를 회견장에서 축출했다. 여타분야 기자들은 정말 이해가 안가겠지만, 정치 취재 현장에서는 때로는 이런 언론까지 결부된 ‘편가름’이 감지된다.

정당을 떠나 ‘정치 산업계’의 속성을 공유한 것인지, 이번 민주당의 기자이름 거론에서 비슷한 치졸함이 엿보인다. 기사에 대한 최종책임은 언론사의 주필과 편집인이 지는 것이다. 블룸버그에 따질 것이 있다면 블룸버그만 언급하면 될 일이지, 기자 이름은 왜 성명에 넣어서 초라한 꼴을 자초하는지 모를 일이다.

이번 소동에서 역사적 관점에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블룸버그의 ‘수석대변인’ 표현이다.

만약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북한의 단파라디오를 들고 암호를 적는 모습이라도 봤다면 이 표현은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문재인 대통령은 1976년 한반도 정세가 1953년 종전 후 가장 심각했을 때, 북한 지역에 투입돼 초소를 파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과연 ‘김정은 수석대변인’ 표현은 무슨 근거에서 나왔나. 공원 그늘에 모인 시민들의 객담에서 흔히 오가는 말이라고 언론에 다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한국은 독재자들이 무고한 사람을 ‘용공분자’ ‘북한간첩’으로 몰아가서 수많은 인명을 빼앗은 매우 어둡고 뼈아픈 역사를 갖고 있다. 미국의 매카시즘처럼 사람을 잡아 가두는 데만 그친 것이 아니다. ‘좌경’딱지는 부당한 공권력의 탄압뿐만 아니라 대중광기에 의한 살인도 초래하는 상습수단이었다.

오랜 세월, 독재자들의 ‘용공조작’에 시달려온 정당의, 선거를 통해 당선된 대통령마저 ‘북한 대변인’ 소리를 들을 정도라면, 한국사회에서 ‘매카시즘’이 조금만 기승을 부려도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는 현실이 여전한 것이다.

아무리 이스라엘 사람에게 못마땅한 것이 있어도 ‘나치 추종자’라고 욕할 수는 없다. 이런 이치를 전 세계 유력언론인 블룸버그가 절대 모를 리 없다.

그런데 블룸버그는 한국에서 누구를 ‘북한 대변인’이라고 부르는 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는 모르는 모양이다. 토니 블레어를 조지 W. 부시의 푸들로 부르는 것과 또 다른, 엄청난 살기를 조장했던 한국사의 어두운 면에 대해 무지한 듯하다.

대북정책의 무분별함을 지적할 때, 과거 레드컴플렉스를 연상시키는 것들이 섞일수록 진정성을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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