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단체의 기계적 반응, 재벌회장들에게 도움은 되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전국경제인연합회와 한국경영자총협회 등 재계의 반응은 역시나다. 혹시 이번만큼은 워낙 심각한 ‘막장사태’에 대한 고려가 일부나마 반영될까라는 기대는 헛된 것이었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이사 선임이 27일 주주총회에서 부결된 데 대한 이들 단체의 반응이다. 예상대로 “연금사회주의”라는 말도 동원됐다.

예전 같으면, 재계 5단체 ‘긴급회동’이라고 해서 다섯 명이 결연한 표정으로 줄지어 걸어가는 사진을 뉴스에서 보기도 했는데 요즘은 어떨지 모르겠다. 이 행렬에 단골로 나오던 사람가운데 하나는 2년 전 쯤 다른 일로 무수하게 뉴스에 등장했었다.

‘연금사회주의’라는 말까지 썼다면,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재계단체와 회원사들은 결연한 저항을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단단해야 할 이 대오에 김새는 일부터 생겼다.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아시아나항공, 금호산업 등 2개 계열사의 대표이사직과 등기이사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주주총회에서 박 회장의 이사선임이 또 한바탕 힘겨루기가 될 뻔했는데 그냥 없는 일이 돼 버렸다.
 

▲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2018년 7월 '기내식 대란' 직후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 /사진=뉴시스.


박삼구 회장은 현재 조양호 회장과 가장 비슷한 처지에 있는 재벌총수다.

일부 계열사의 심각한 부실뿐만 아니라 회사 내 눈살 찌푸리는 ‘회장님 의전’이 문제가 됐다.  회장 일가가 직원들을 직접 위협한 일이 나타나지 않은 건 다른 점이다.

무분별한 ‘CEO리스크’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진 마당에 박삼구 회장의 이번 선택만큼은 비판의 여지가 별로 없다.

그러나 하루 전에 “연금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맞서는 기색을 보인 재계단체는 뭐가 된단 말인가.

한국에서 ‘공산주의’나 ‘주체사상’과 비슷한 단어로 혼용되는 이 단어를 개인 입장문에 집어넣은 사람들은 삼고초려를 해서라도 박삼구 회장이 물러날 뜻을 접고, ‘투쟁’의 최일선에 남아 29일 주주총회에서 반드시 이사로 선임되도록 간원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들 단체의 회원이기도 한 박삼구 회장의 판단은 좀 달라 보인다. 그는 이번 퇴진의 이유로 “금융시장 혼란 초래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금호그룹 경영의 공과와 별개로, 현재 상황에 대한 판단은 다수 투자자들, 일반 국민과 별로 다를 것이 없다.

박 회장뿐만 아니라 모든 재벌회장들이 보통사람과 뭔가는 달라서 재벌 총수를 하는데, 판단능력이 일반인에 뒤떨어질 리가 없다.

그런데 이들 총수가 한데 모여 있는 재계단체의 차원이 되면, 하는 행동마다 와 닿기보다 ‘돈키호테’같은 엉뚱한 일들만 벌인다.

그렇다면, 재계단체의 운영방식과 관행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볼 때가 아닐까 한다.

재계총수 이사선임 불발과 국민연금이란 ‘떡밥’만 보고 무턱대고 물어버리는 것이 현재 재계단체의 조건반사적 반응이다.

국민연금이 ‘무소불위’ 완장질하면 안된다는 경각심이 높아진 건 분명하다. ‘적극적 주주권행사’나 ‘스튜어드십 코드’를 강조할 때 동전의 양면처럼 뒤따라오는 부작용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수 십 년 세월, 유일고객인 국민들의 신뢰를 그다지 높이지 못한 국민연금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용론’에 시달리는 전경련이 “이 때다” 싶어서 뛰어들 절호의 찬스였는지는 모르겠다.

당장 이렇게 주주총회도 하기 전에 재벌회장 스스로 이사에서 물러나겠다는 사람이 나오는 마당이다.

한국 재벌은 사실 ‘한강의 기적’과 직접 통하는 개념이어서 원래는 대단히 긍정적 이미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심지어 영어로도 ‘chaebol’이란 단어가 부정적으로 간주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반기업정서는 원인의 극히 일부다.

근본 원인은 재벌이 현재는 ‘반시장적’으로 존재하는 측면이 크다는데 있다. 시장참가자들의 상식과 거듭 어긋나는 재계단체의 행보가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전경련 같은 재계단체도 물론 ‘시장’을 엄청나게 강조한다. 그런데 이들이 시장을 강조할 때 잘 살펴보면, 이들의 ‘시장’은 ‘경쟁을 보장하는’ 시장이 아닌 그들만의 특수한 시장이다.

시장의 핵심은 공정경쟁이다. 그걸 통해 적정가격을 만드는 시장이 지속가능한 생명력을 갖는다.

재계단체가 시장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할 때는 늘 이런 인식의 문제가 엿보인다. 그것이 오늘날 전경련 무용론으로 이어지고 있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