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고려시대 있었을 법한 왕과 사관의 대화를 상상해 봤다.
 

“사관, 어제 내가 사냥 나가서 곰 잡은 거 실록에 넣어라.”

“몇 년으로 기록할까요?”

“중국 연호 쓰면 되잖아? 새삼 왜 묻고 그래?”

“그 연호 못 써요. 황제 또 도망갔어요.”

“통일한지 몇 년 됐다고 황제가 도망을 가?”

“2년이면 이번 황제는 오래 한 편인데요?”

“야 중국 거 더 못 쓰겠다. 우리 연호를 아예 만들자. 어제 사냥 꼭 적어야 돼.”


고려는 태조왕건과 4대 광종 등 몇몇 임금이 연호를 썼다. 이때는 중국이 아직 5대10국의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때다.

지금의 서기처럼 전 세계적으로 폭넓게 쓰이는 연도 표기법이 없던 시절이다. 농사짓는 평범한 백성에게 계절이 새로 와서 저무는 것 말고 해가 바뀌는 것은 나이 계산할 때나 쓸 일이지만 국가의 차원은 다르다.

역사를 연구할 때, 주요사건을 중국이나 여타 국가 기록과 비교도 해야 되고 외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 기준시점도 들어가야 했다.

고려문종 10년은 서기 1055년이다. 고려가 당시의 패권국인 요나라에 보내는 문서에 “1055년”이 들어갈 리도 없지만, 고려의 자주성을 드높인다고 해서 “문종 10년”이라고 적었을 리는 더더욱 없다. 왜냐하면 ‘문종’이란 묘호는 고려 전성기를 이끈 이 임금께서 승하한 후 지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문종을 뜻하는 ‘무슨 10년’이라고 적는다 해도, 실무적으로 불편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그런 표기를 했다면 그게 바로 연호가 된다.)

요나라는 고려를 세 번이나 침략했다가 무참한 패배를 맛봤기 때문에 고려가 이런 식으로 썼다한들, 불평을 심하게 했지 완전 판을 엎을 정도로 화를 낼 처지는 못 됐다. 이후 선종 때 각장 설치에 관한 외교 분쟁을 봐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고려가 무모한 국가가 아닌 이상, 이 세상 천하 고려 관리들만 아는 연호를 쓸 턱이 없다. 양국의 업무협의에 쓸데없는 불편을 초래하는 일에 불과하다. 상식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인 요나라 연호를 공유하는 것이 당연했다.

연호는 천자의 전유물이라는 상징뿐만 아니라, 기록물 관리를 위해서도 필요한 개념이었다.

물론, 수 백 년 동안 안정적으로 통치하는 천자라야 그의 연호가 존중을 받았다. 어제 새로운 천자가 황궁에 입성했다가 내일 쫓겨나는 그런 난세에는 온 천하가 공유할 연호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런 난세라면, 고려나 다른 나라들은 각자 알아서 연도를 표기할 방법을 정해야 했다. 태조 왕건의 ‘천수’ 연호나 광종의 ‘광덕’ 등 건원(연호 세우기)은 당시 동북아정세와 관련돼 있다.

말하자면, 연호는 특정국가의 위세과시보다 현실에서 비롯된 관행이 만들어내고 국제적으로 인정된 측면이 강하다.

외환시장의 환율표기도 이와 비슷하다.

환율에 관심을 갖는 독자들도 추측하겠지만, 환율표기 역시 국가의 비교가 들어가 있다. 통용력이 더 큰 나라의 통화를 기준으로 다른 나라 통화가치를 표시하는 것이다.

원화환율을 얘기할 때 “1달러는 1136.6원”이라고 얘기하지 “1원은 0.0008 달러”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애국심 때문에 "1원은 0.0008 달러"라고 환율을 표시하는 딜러는 아무도 없다. 지난 1일 서울 을지로 KEB하나은행 딜링룸 모습. /사진=뉴시스.


엔화도 마찬가지다. “1달러는 111.73 엔”이지 “1엔이 0.0089달러”라고 아무도 얘기하지 않는다.

미국달러와 영국파운드는 사정이 다르다. 달러의 통용력이 훨씬 더 크지만, 이 환율은 지금도 파운드 중심으로 표기한다. 20세기 초까지 영국이 전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파운드의 약칭도 GBP다. 오늘날 영국을 나타내는 것들 가운데 지금은 사라진 ‘대영제국(Great Britain)의 흔적이 거의 유일하게 환율약칭에 남아있다.

독일마르크와 프랑스프랑 등 유럽통화들은 모두 달러를 기준통화로 표시했지만, 유로 단일통화 출범 후에는 유로가 달러에 대해 기준통화로 표시된다. 유로는 파운드에 대해서도 ‘천조국(?)’ 행세를 한다. 완전히 추측만 하자면, 이해가 다른 여러 나라가 단일 통화존으로 통합하는 노력에 대한 경의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한다.

특이한 것은 호주달러와 뉴질랜드달러가 미국달러에 대해 기축통화 노릇을 한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독립된 나라들이어서 이 나라 통화도 파운드 행세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화폐의 이름은 ‘호주파운드’가 아닌 ‘호주달러’다. 환율은 현재 1호주달러당 0.7105 미국달러다.

왼쪽과 오른쪽을 나눈 기축통화 표시는 외환시장에서 절대적이다. 이걸 자신만의 애국심 등으로 인해 멋대로 바꾸는 딜러는 없다.

달러와 엔화거래를 할 때 오가는 문자는 간단한 숫자뿐이다.

“63/83”

“USD 2MIO 63”

이걸 풀이하자면, 첫 번째 딜러가 “엔화사고 달러 팔 때 111.63 엔, 엔화팔고 달러 살 때 111.83엔”의 환율을 제시한 것이다. 2016년 6월23일, 영국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 탈퇴, 즉 브렉시트가 결정될 때와 같이 급변동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이 두 사람이 퇴근할 때까지 “63”이 111.63 엔이 아닌 110.63 엔이나 112.63 엔을 의미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두 번째 딜러는 “1달러당 111.63 엔에 200만 달러를 사겠다”고 확인한 것이다. 63을 적음으로써 달러를 파는 것이 아닌 사는 것을 표시했다. 거래는 이것으로써 체결이 됐다.

하루에 딜러 한 명이 수 십 건도 벌이는 외환거래는 이렇게 체결된다. 곧이어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거래확인서를 출력해서 두 딜러에게 나눠준다.

만약 이런 관행에 뻔뻔한 거짓말로 이의를 제기하는 딜러가 있다 해도, 문자가 오간 내용이 근거가 된다. 관행을 무너뜨리려한 사람은 더 이상 시장에 발을 붙일 수 없다.

짧은 숫자 교환이 엄청난 규모의 외환거래를 완벽하게 표시하는 것은 기축통화 등에 관한 관행들이 절대적인 권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오는 5월1일 새로 즉위하는 나루히토 차기임금의 연호를 ‘레이와’라고 정했다. 일본 금융기관은 지금도 연호를 기록하고 있어서 기존의 ‘헤이세이’ 연호를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옛날 천자들이 쓰는 연호와 달리, 일본 임금의 연호는 일본사람들 생활의 일부에만 쓰일 뿐이다. 대부분 입헌군주제 국가들에서 왕실은 현실 정치와 격리돼 있고, 국민통합의 상징으로만 기여한다. 일본의 연호는 일본사람들이 ‘우리 나라가 이렇게 전통이 깊은 나라다’라고 과시하는 의미정도다.

페이스북에서는 일본 언론 하나가 ‘레이와’ 연호에 대해 연일 무슨 글을 홍보하고 있는데, 그보다는 물러나는 헤이세이 임금이 남기는 행간의 메시지가 무엇인지가 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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