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시루도 사라지고, 갈아타기 요금도 없어졌는데...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도로에서 끼어들기가 몸집이 커다란 버스의 ‘당연한 특권’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승용차들이 알아서 피하라는 식으로 버스가 바짝 다가서며 끼어들기를 하면 승용차운전자들은 피하는 길밖에 없었다.

버스 기사들은 자기만 끼어들기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막히는 차선에 빈 공간이 생겼는데도 버스가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승객들이 의아하게 여기는데, 옆 차선에서 다른 버스가 한 대 달려와 이 버스의 빈 공간 앞으로 끼어들어왔다. 회사가 다른데도 버스 기사들 사이에는 이렇게 버스의 우선권을 서로 챙겨주는 관행도 갖고 있었다.

당시 버스는 승객 더 태우기 경쟁이 지나쳐 기사들이 한번이라도 더 많이 운행하도록 극도의 스트레스에 몰렸다고 한다. 버스 난폭운전의 원인으로 지적됐다. 그런데 회사도 다른 버스끼리 차선을 양보해주던 것을 봐서는 단순히 지나친 경쟁만이 이유는 아니었던 듯하다. 극도의 스트레스 속에 하루 종일 콱콱 막히는 도로위에서 사는 기사들만의 ‘우리 의식’도 작용했다.

사람의 마음이 가진 이중성은 여기에도 적용됐다. 승용차를 몰고 도로에 나가면 몸집 큰 버스의 끼어들기가 아주 불안하고 밉쌀 맞았다. 그런데 버스 승객이 되고 나면, 유독 내가 탄 버스기사만 준법운전을 하는 것 아니냐는 고약한 의심이 생겼다.

지금 이런 것들은 아주 오래전 얘기가 됐다.

버스는 이제 정해진 차선에 무리하지 않고 정류장 꼬박꼬박 다 서가며 운행을 한다. 버스기사는 타고내리는 손님들에게 일일이 인사도 한다. 이런 버스에서 “아저씨는 왜 법대로만 운전해요?”라고 따지면, 기사는 차를 세우고 일장 훈시를 할 기세다.

그래서 버스파업이니 하는 것들이 한동안 시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었다.

요즘 다시 버스파업 얘기가 가득하다.

공공수단이요, 서민의 발인 파업은 정말 부당한 일이다. 어떻든 파업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요즘 버스가 예전에 비해 이렇게 좋아지니 평소부터 궁금한 것이 있기는 했다.
 

▲ 사진=뉴시스.


버스가 좋아진 점은 점잖은 운행뿐만 아니다. 무엇보다 2005년부터 시행된 지금의 환승체계는 최고의 걸작이다. 물론 이 때 버스정책이 완전무결했던 것은 아니다. 버스 노선번호를 갑자기 다 뜯어고쳐 전 시민, 특히 장노년층을 길 잃은 사람처럼 만든 것은 버스 정책을 버스 탈 줄 모르는 사람들이 만든 폐해 가운데 하나다.

아무튼 예전에는 서울시내 웬만한 곳을 갈 때마다 최소 한 번은 버스를 갈아타야 했고 요금을 두 번 내야 했는데, 지금은 합리적인 환승요금만 내면 된다. 지하철에 비해 말단수송의 기능이 탁월한 버스를 과도한 요금 없이 세 번 네 번도 탈수 있다는 건 대단한 개선이다.

의문점은 이렇게 요금을 덜 내게 됐으면 누군가는 예전에 비해 손실을 볼 수밖에 없는데 그걸 어떻게 견디느냐다. 내가 2600원 내던 요금을 1300원만 내면 그만큼 덜 받는 사람은 어떻게 사업을 하느냐다.

2005년 버스 개편 때 버스의 공공성을 중시해 버스회사의 적자를 공공의 돈으로 보전해 주기로 한 건데, 지금 그 체계가 또 다시 오래된 것이라 해서 버스업계가 파업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시내 교통에서 버스의 중요성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 잘 맞추는 지하철이 있다 해도, 버스는 지하철에 비해 말단수송의 강점과 답답한 지하공간에 머물지 않는다는 강점이 있다.

그래서 지금도 많은 시민들은 지하철보다 버스를 애호하는 사람들로 남아있다. 하지만 버스 타는 시민들과 버스정책 만드는 사람들의 생각이 같은 지 의심이 들 때가 많다. 1980년대의 홀짝구분, 2008년의 “다음 정류장은 아무개 대통령 가옥입니다” 같은 정책들이 대표적이다.

대도시들은 그동안 버스전용차로 건설 등을 통해 막대한 인프라투자를 했다. 이걸 잘 활용해야 할 필요도 있다.

버스회사는 어떻게 먹고 사나라는 의문이 드는 점 또 하나가 있다.

1980년대만 해도, 등굣길 버스는 ‘콩나물시루’였다. 발 디딜 틈이 없던 당시 버스의 풍속도 가운데 하나는 가방 들어주기였다. 앉아있는 사람이 서 있는 학생의 책가방을 들어주는 미덕인데, 단순히 무거운 걸 덜어주는 것뿐만 아니었다. 가방 하나가 앉은 사람 무릎위로 옮겨가면 서 있는 사람들이 한결 편한 공간의 여유를 얻었다. 그만큼 이 때 버스는 승객이 많았다.

지금 이런 버스는 출퇴근 길에도 찾기 힘들다. 당시처럼 사람 많은 버스는 새벽 2~3시 무렵의 심야버스뿐이다.

심야버스가 이렇게 승객이 많은 걸보면, 그동안 이 시간대 얼마나 많은 사람이 대중교통 부재에 시달렸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또한 버스의 장점이다. 차량을 여러 대 연결해 대규모 운송을 하는 지하철은 이 시간대 이렇게 다닐 수가 없다.

어떻든, 낮 시간에는 콩나물시루도 사라지니 버스는 더욱 쾌적해졌다. 이렇게 쾌적해진 버스를 탈 때 아주 가끔 ‘버스 회사는 뭘 먹고사나’라는 생각이 잠깐 든다.

이래저래 그동안 세월을 길게 보면, 버스회사가 예전보다 수입이 줄어든 것들은 있다.

그래도 동서고금 불변의 법칙 ‘밑지고 장사하는 사람’은 없다. 다 거기에 무슨 방법이 있으니 여태 이렇게 지내왔을 것이다.

공공성을 강조해 적자를 보전하기도 했는데, 사실 이보다는 버스 자체의 수익을 높이는 것이 바람직한 건 분명하다.

‘버스 매니아’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불만은 꾸불텅꾸불텅 노선이다. 서울역 고가도로가 사라질 무렵 일부 노선은 특히 심각했다. 남대문에서 만리동으로 한 번의 신호 없이 다니던 버스가 갑자기 세종로 이순신 동상까지 보고 다녀야 했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다.

2005년 버스 개편 때 명분 가운데 하나가 노선의 직선화였는데 어느 덧 세월이 지나더니 다시 버스노선도는 다양한 변화구를 자랑한다. 이 또한 노선의 수익성 증가를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버스 전체의 이미지와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수도권 버스정책이 대단히 힘들다는 당국자들의 고충은 충분히 통감한다.

전 세계 인구 300만 명이 넘는 대도시 가운데 서울처럼 사장님뿐만 아니라 부장 이하 과장들도 주중에 다 차를 몰고 나오는 이런 곳이 얼마나 될까.

유독 여흥을 즐기는 한국인들인데 저마다 차를 몰고 다니는 것도 미스터리다.

그런데 이런 건 절대로 시민의식의 문제가 아니다. 과장 대리도 모두 차를 몰고 다닐만한 환경이니 그러는 것이다.

너도나도 차를 몰고 다니다보면, 도로위의 버스는 장애물로 보일 것이다.

버스를 시민을 실어 나르는 수단보다 장애물 취급한 정책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1980년대의 빨간 버스, 파란 버스가 바로 그런 정책이다.

그런 정신 나간 정책이 있기도 했지만, 어떻든 1000만 명이 모두 직접 운전을 해야겠다는 도시에서 버스 정책하는 사람들은 고생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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