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재벌 부채비율 평균 518%로 심각한 상태, 삼성빼고 모두 200% 넘어

내가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 임명장을 받은 것은 1998년3월14일이고 금감위가 현판식을 가진 것은 그해 4월1일이었지만 실제는 많은 멤버들이 그 이전부터 여의도 증권감독원(현 금융감독원) 빌딩에 모여 금감위 설립을 위한 사전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나 또한 임명장을 받기 한 달 전부터 여의도 팀에 합류해 금감위 설립 준비작업에 동참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금감위 발령 직후 처음엔 “내가 또다시 새 조직에 가는 구나”하면서 다소 어색하고 생소한 마음으로 여의도에 입성했지만 외환위기 극복을 위한 핵심조직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커다란 책임감이 나를 또다시 비장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게다가 “군 복무시절 새로운 사단도 창설해 보고 재무부 재직 때도 툭하면 신설조직에 근무했던 내가 못할 게 뭐가 있느냐”는 나만의 경험과 자존심도 여의도로 향하는 발길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금감위 근무길에 오르면서 “우리나라에 외환위기가 왜 일어났고 어떻게 확산되었는가”하는 원인부터 파악해야했고 그 이유가 의외로 간단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원인인즉 무엇보다 외환수급과 관련해 물량, 규모, 기간이 맞지 않은 게 문제였다. 다시 말 해 외화자금수급에 미스매칭이 생기면서 대외 지급능력에 문제가 생겼고 기업은 기업대로 자금의 적기조달에 차질이 생겨 기업 부도가 속출하는 동시에 금융기관마저 덩달아 부실의 늪에 빠지면서 나라 전체가 도산할 위기에 까지 몰리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즉 미스매칭을 해소하고 기업 및 금융기관 연쇄도산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각오로 98년 2월 당시 증권감독원 빌딩 10층에 마련 된 금감위 상임위원실에 첫 출근을 하고 나서야 나는 이미 전년 말인 1997년12월27일부터 기획단이 출범해 활동에 들어간 상태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한 그제서야 나는 “결국은 DJP(김대중-김종필 두분 영문 약자의 합성어)연합 정부에서 경제문제는 JP(김종필님의 영문 약어)쪽이 맡기로 했었구나, 그래서 김용환 전 재무부 장관 주도로 기획단이 출범 했었구나, 또 그 일환으로 이헌재 위원장이 기획단의 일원이 된 뒤 1998년1월 비상경제대책위원회(비대위)를 만들어 이 조직의 위원장이 되고 나아가 초대 금융감독위원장까지 맡게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내가 상임위원 발령을 받고 보니 비대위에선 이미 전국경제인연합회에 30대그룹 기획조정실장을 모이게 하고는 그룹별 구조조정 계획을 제출케 한 상태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들 30대 그룹에 대해선 은행권의 주도아래 자율적인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한다는 원칙까지 세워져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내가 금감위 상임위원에 취임했던 것이다.
 
이어 이헌재 위원장은 내게 금감위 설립작업과 필요 업무를 맡기기 시작했다. 또한 외환위기극복을 위한 기업 및 금융구조조정과 관련해선 금감위원장이 주도적 역할을 맡고 내가 조수 역할을 하는 식으로 상황이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금감위원장은 내게 많은 일을 맡겼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물어가며 업무에 나설 처지도 아니었다. 따라서 내 나름대로 생각해 왔던 원칙대로 금감위 설립 및 구조조정과 관련한 조력에 나서기로 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기업들의 구조를 튼튼히 하는 게 급선무였고 그러자면 은행구조 또한 굳건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또 이렇게 해서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 은행과 기업의 구조조정은 동시에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금감위원장의 생각 또한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기며 일처리를 해 나가기로 방향을 정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부임하기 전 비대위 측도 이미 대통령 보고까지 거친 기업구조조정 5대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첫째, 기업경영 투명성 제고, 둘째 상호지급보증 해소, 셋째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 넷째 핵심역량 강화, 다섯째 지배주주 및 경영진 책임 강화 등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들 원칙중 기업 재무구조 개선에 최우선 역점을 두기로 했다. 5대 원칙 중 투명성 제고니 책임강화니 핵심역량 강화니 하는 대부분의 원칙은 다분히 추상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재무구조의 획기적 개선은 명확한 목표를 갖고 추진할 수 있는 유일한 항목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업의 부채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도록 하는 게 기업 구조조정의 핵심 내용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물론 부채비율은 낮을수록 기업의 재무구조는 건전하겠지만 당장 실현가능한 비율은 경제상황에 따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기업 구조조정은 처음부터 산 넘어 산이었다. 기업 부채비율이 워낙 높았기 때문이다. 금감위 출범이후 1년동안 그토록 재무구조를 개선하라고 다그쳤는데도 1999년6월말 현재 삼성그룹만 부채비율이 192%로 200%룰을 유지했을 뿐 다른 그룹은 모두 금감위의 요구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나마 SK(227%)와 LG(246%)는 200%에 근접하고 있었고 대우(588%)와 현대(342%)는 아예 300%밖에서 심각한 위기상황을 맞고 있었다.
 
아울러 30대그룹 평균 부채비율 또한 518%로 심각한 수준을 나타내고 있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재벌그룹 구조조정 방향도 명확해지고 있었다. 5대그룹 중에선 대우와 현대그룹이 구조조정의 집중 타깃이 될 수밖에 없었고 30대 그룹 역시 강도 높은 자구노력이 필요 했던 것이다. 다만 30대 그룹에 대해선 기조실장들에게 재무구조개선약정 자료를 내도록 했고 이를 근거로 은행권을 중심으로 자율 구조조정에 나서도록 지침도 내려 놓은 만큼 대우 현대를 제외한 나머지 그룹들에 대해선 은행만 잘 감독하면 된다는 게 내 생각이었고 또 그런 방향으로 구조조정 정책이 추진되고 있었다. 금감위원장 또한 이같은 방향으로 구조조정을 지휘하고 있었고 나 역시 묵시적 합의아래 같은 맥락에서 조력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려 노력했다. 그 결과 30대그룹에 대한 구조조정은 급한대로 은행의 역할아래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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