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구조조정땐 관치 소지 없애기 위해 철저히 민간 위원회에 일임

30대그룹에 대한 구조조정의 가닥을 잡고 나니 이젠 금융권이 문제였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들이 구조조정을 당할 차례가 된 것이다.


금융기관, 특히 은행에 대한 구조조정은 자산 건전성을 기준으로 진행키로 방침이 정해졌다. 건전성이 취약한 은행에게 국가 금융시스템을 맡길 수 없었을 뿐 더러 부실한 은행들에게 기업구조조정을 책임지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은행 구조조정 방향이 정해지자 이젠 누구에게 구조조정의 총대를 메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금융감독위원회 마음대로 은행을 죽이고 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기업 구조조정을 은행의 주도하에 하도록 했듯이 객관적이고도 공평한 잣대를 갖고 은행 건전성을 평가한 뒤 구조조정 대상을 정할 수 있게 할 뭔가 특별한 시스템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런 목적으로 탄생시킨 것이 바로 1998년6월에 출범한 은행경영평가위원회였다. 위원회는 곧바로 공인회계사와 변호사 등 각 분야 전문가 12명을 평가위원으로 선정해 공식 활동에 들어갔고 이들은 비밀리에, 그리고 전격적으로 은행 평가작업에 착수했다. 대신 은행 평가와 관련해 금융감독위원회는 일체 관여치 않기로 입장을 정했다. 관치행정이라는 오해의 소지를 일체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적으로 은행경영평가위원회에 맡겨 그 결과에 따라 은행의 운명이 결정되도록 했던 것이다.

은행 구조조정과 관련해선 국제결제은행기준 자기자본 비율 즉, BIS비율 8%를 기준으로 이 기준을 넘는 은행은 승인, 다소 미달하는 은행은 조건부 승인, 아주 미달하는 은행에 대해선 불승인 은행으로 각각 분류해 케이스 별로 서로 다른 클린화의 길을 정하기로 했다.

은행경영평가를 통해 불승인 또는 조건부 승인 대상에 오른 은행에 대해선 가혹한 구조조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금감위원장은 금융구조조정과 관련해 1+1은 2가 아니고 이를 테면 1+1은 1.2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했었다. 이 말은 다시 말해 은행과 은행이 합병을 하게 되면 모두 다 살아남는 게 아니고 인원이든 조직이든 자산이든 상당부분 감축이 불가피 하게 될 것이란 뜻이었다.

그랬다. 우선 은행 자산은 우량자산과 부실자산으로 나눈 뒤 우량자산은 우량자산끼리 합쳐 굿뱅크로 가져가고 반면에 부실자산은 부실자산 끼리 모아 배드뱅크화 한 뒤 자산관리공사(KAMCO)에 넘기거나 국내외에 매각하는 등 별도로 조치토록 했다.

아울러 은행 자산 감소 및 합병으로 인해 중복되는 조직과 인력 또한 과감히 줄이도록 유도키로 했다.

이런 가운데 1998년6월29일 은행경영평가위원회가 드디어 빅 카드를 꺼내들었다. 이 위원회 주도로 퇴출대상 은행을 선정해 기자회견장에서 그 명단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이다. 내가 10년 전 뉴욕 재무관 시절 미국에서 목격했던 부실은행 퇴출 작업이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눈앞의 현실이 되어 추진되고 있었다. 평가위원회의 퇴출은행 명단 선정은 비밀리에 전격적으로 진행됐다. 명색이 금감위 고위층인 나한테 조차도 기자회견 직전까지 비밀에 부쳤을 정도였다. 나 또한 이날 발표현장에서나 부실은행들의 운명을 확인할 수 있었고 그것은 내게 있어서도 큰 다행이었다. 만일 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퇴출은행 명단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이로 인해 금감위가 어떤 난처한 지경에 빠질지 모를 위험천만한 상황이 연출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은행평가위원회의 결정은 단호했고 은행권엔 일대 M&A(인수 합병)와 퇴출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우선 건전성이 열악한 동화 대동 동남 충청 경기 등 5개 은행이 불승인 은행으로 분류돼 우량은행에 흡수 합병될 운명을 맞고 있었다. 특히 이들 5개 부실은행 중엔 BIS비율이 무려 마이너스 9.6%에 이를 정도로 건전성이 아주 위험한 곳도 있었기에 일부 부실은행에 대한 강제 구조조정은 불가피하고도 다급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래선지 이들 부실은행은 BIS비율 8% 이상을 기록한 5개 승인은행, 즉 국민 주택 신한 한미 하나은행에 가차없이 흡수 합병되는 수순을 밟아야 했다. 동화은행은 신한은행에, 대동은행은 국민은행에, 동남은행은 주택은행에, 충청은행은 하나은행에, 그리고 경기은행은 한미은행에 인수된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 했다.

그런가 하면 조흥 상업 한일 외환 평화 충북 강원 등 7개 은행은 조건부 승인은행으로 분류됐다. 아울러 이들에 대해선 조건부 승인은행끼리 합병토록 구조조정 방향이 잡혔다. 그 결과 상업은행과 한일은행이 각각 자본금감액(감자) 과정을 거친 뒤 합쳐져 한빛은행(현 우리은행)이 되었고 충북과 강원은행은 조흥은행에 통폐합돼 훗날 신한은행에 다시 흡수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한편 제일은행은 1999년7월20일 뉴브릿지에 팔린뒤 다시 SC은행으로 변신했는데 당시 나는 제일은행 매각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외환은행은 훗날 론스타에 넘겨진 뒤 최근 하나금융지주에 다시 인수되는 운명을 맞았다.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선 내가 2000년 금융감독위원장 자리에 오르고 난 뒤 여러 곳에서 입질이 왔으나 내 임기 중엔 매각이 성사되지 못했다. 내가 금융자본에만 매각 자격을 부여 했을 뿐 산업자본에 대해선 철저히 인수참여를 배제시켰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 실세와 인맥이 닿는 한 컨설팅 업체에선 외환은행 매각조건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어왔으나 나는 산업자본에는 매각할 수 없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양해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내가 물러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후임 위원장의 판단에 따라 외환은행은 론스타라는 펀드에 매각되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분쟁의 소지를 가진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다.

이처럼 은행을 비롯한 금융구조조정을 마치고 나니 국내 금융기관 수가 현저히 줄어 있었다. 1999년 말 현재 은행은 33곳에서 23곳으로 10개나 줄었고 외환위기의 주역이었던 종금사 역시 30개에서 10개로 무려 3분의 2가 퇴출되는 결과를 낳았다. 또 국내 전체 금융기관 수도 436곳에서 322곳으로 무려 114곳, 20%가 줄어 있었다. 이처럼 대강의 금융구조정이 끝났을 때 나는 비로소 2000년1월 금융감독위원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내가 금융감독위원장이 되어서는 신규 금융 구조조정보다는 금융 안정화쪽에 좀더 무게를 두고 각종 금융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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