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극복 와중에 불쑥 찾아온 감찰 관계자, 지인 모함으로 고통받아

제2대 금융감독위원회위원장 겸 금융감독원장이란 감투를 쓰고 대우사태며 현대문제며 금융노조파업에 이르기까지 온갖 궂은 일을 해결해가며 주마가편(走馬加鞭)을 하고 있을 무렵 내겐 느닷없는 ‘급정지’ 신호가 날아들었다. 갑자기 말에서 내리라는 것이었다. 2000년8월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어찌할 것인가. 명령은 명령인데. 비록 갑자기 내리라고 해서 내려오긴 했지만 억울하지는 않았다. “이게 다 내 부덕(?)의 소치”라고 생각하니 금새 마음이 평온해졌다. 그랬다. “최근에 그(?)가 내게 그런(?) 제의를 했을 때 거절한 결과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그리고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구나”하고 생각하니 쓴웃음이 나왔을 뿐이었다. 그러나 정도(正道)를 어기면서까지 금융감독위원장직을 계속 붙잡고 싶지도 않았다. 적어도 ‘운명의 장난’이 아닌 ‘사람의 장난’이 가져다 준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으로 통치권자 주변에 머물게 될 분들에게는 거듭 당부하고 싶다. “순진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을 ‘바보 아닌 바보’ 취급하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자리 갖고 장난치지 말아 달라’고” 말이다.
 
그래도 나는 지난 3년간 금융감독위원회가 있어 행복한 공무원이었다. 외환위기, 즉 환란으로 나라가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해 있을 때 금융감독위원회 상임위원으로 부임해와 차관급인 부위원장도 거치고 비록 8개월이었지만 장관급인 금융감독위원장까지 지내면서 소방수가 되어 국가위기 해결에 일익을 담당했다고 생각하니 뿌듯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다.
 
게다가 이 기간 동안 난 30년간 공직생활을 하면서 수없이 많이 쌓아온 경험과 지식을 유감없이 쏟아 부으며 환란 탈출에 기여할 수 있었고 그 바람에 1999년 부위원장시절부터 2000년 7월 금융노조파업 해결 때까지 대통령께서 무려 3번이나 내게 직접 전화를 걸어 칭찬도 해 주시고 소신껏 일하라며 격려도 해 주셨기에, ‘나만큼 행복했던 공무원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하고 반문할 이야기 거리도 있었다.

더구나 이 중차대한 시기에 내 주변에는 유능한 공직자와 동료들이 함께있어 생사고락을 같이하였기에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모든 이들의 노력이 주효했지만 특히 이우철 기획실장, 김석동, 이두형국장 등 많은 이들의 도움을 잊을 수 없다. 
 
또한 환란을 치유하면서 많은 진리를 터득할 수 있었던 것도 내겐 크나큰 보람이었다. 나는 금감위 근무동안 개인이든, 사회든, 나라든 한번 길을 잘못 들게 되면 이를 돌이키기 위해반드시 그 댓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록 잘못된 길로 접어들어 위기에 직면하더라도 적기에 시정조치만 잘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는 진리도 터득할 수 있었다. 환란이라 불리는 무서운 스승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내게 가감없이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가 깨달은 건 이것만이 아니었다. 금융감독위원회에 와서 또하나 절감한 것은 ‘공직자에겐 햇빛 없는 구름 낀 날에도 그림자가 따라다닌다’는 사실이었다.
 
부위원장 시절인 1999년8월24일이었다. 이날 국가기관 사정팀 관계자라는 사람이 날 찾아왔다. 이유인즉 “그간 부위원장님과 관련된 투서가 무려 4~5차례나 날아들어 3개월이나 미행해 가며 뒷조사를 했는데 혐의가 없어 오늘 청와대에 이같은 사실을 보고했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들렀다”고 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기막혔다. 투서지는 미국 LA라고 했다. 투서는 여러차례 반복됐지만 한사람의 소행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 투서자는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청와대와 일부 언론을 상대로 나에 대한 음해성 투서를 해왔다는 것이다.

내용인즉 ‘(미국에서 스키는 학생 서민 등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운동임에도) 이용근 부위원장은 재무관 시절 미국에서 경비가 비싸게 드는 스키나 타면서 호화롭게 지냈고’ ‘재산을 아내의 친정어머니 이름으로 해놓고 큰 아파트에서 살고 있으며’ ‘자녀들 또한 고급생활을 하고 있다’는 날조된 사실들이었다. 게다가 ‘이용근 부위원장은 건달이라 일도 잘 못하고’ ‘그 부인은 맨날 호화쇼핑을 다니는데 어떻게 이런 사람을 금감위 부위원장을 시켜줬느냐’하는 엉터리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최근 3개월간 이 부위원장 부부를 상대로 미행도 해보고 뒷조사도 해 보았는데 투서 내용이 전혀 사실과 달라 오늘 ‘혐의 없음’보고를 마치고 이같은 사실을 알려주려고 들렀다”는 게 이 사정팀 관계자의 설명이었다. 사실 아내는 내가 금감위 상임위원이 된 이후 위원장자리가 끝날 때 까지 몇 년간을 매일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동네 친구들과 등산만 하였던 것이다. 그 어떤 사람들이나 동창과도 만나지 아니하였다.
 
어쨌든 사정팀 관계자의 방문이 있은 후 아내가 수소문해 자세히 알아보니 문제의 투서자는 아내의 대학친구이며 아내가 외국회사에 취직도 알선해줬던 정씨 성을 가진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용근 부위원장이) 자기 동생의 신랑을 공직에서 제쳐버렸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오해하고서 온갖 음해성을 지닌 말과 글로 청와대나 신문사에 투서를 했던 것이다. 아내는 근거없는 새빨간 거짓말에 정씨를 무고혐의로 고발한다고 하였으나 주위에서 정신병자나 할 수 있는 있을 수 없는 일에 상대하지 말라고 하여 그만 둔 적이 있었다. 참으로 상상도 못 할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다. 또한 자기의 취직을 도와 준 동창에게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사리판단의 능력을 상실한 채 저지른 일이었다고 생각하니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에 대한 음해는 이 뿐이 아니었다. 내가 금융감독위원장이 되고 나니까 부산출신의 한 국회의원이 ‘내가 퇴임 후 상호신용금고 회장이 되려고 부적절한 운동을 하고 있다’며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그걸 유력일간지로 하여금 보도케 한 일도 있었다. 이 일은 내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승소하고 사과도 받음으로써 일단락됐지만 내겐 큰 상처로 다가왔다.
 
이렇듯 우리 주변엔 조금 힘있다고 여겨지고 조금 높다고 생각되면 그 공직자에 대해 온갖 사실과 동떨어진 말과 글로 헐뜯고 음해하는 나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도 하였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뻔뻔하게 얼굴을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사기와 거짓말로 ‘어디 헤칠 사람 없나’하며 기웃거리고 다니는 한 국가와 민족을 잘되게 하기 위해 꿋꿋이 박봉에 시달리며 앞길을 가는 공무원들은 늘 불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또한 그렇기에 공직자는 내 의지와 달리 때로는 ‘죄없는 죄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앞으로 내 후배들에겐 이런 불행스런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하면서 한도 많고 보람도 컸던 공직자의 소회를 대신하려 한다.

 
   

모함/사진은 내용과 관계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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