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종금 사건은 당시 최위층이 측근 허물 덮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민것

1960년대 말 개발경제시절부터 2000년 초반 환란을 극복하기까지 30여년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나는 요철 같은 인생을 살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일을 잘했다고 대통령의 칭찬도 듣고 훈장도 받으면서 즐거워도 했지만 어떤 때는 온갖 모함으로 좌천도 당해보고 심지어 영어의 몸이 되는 신세까지 겪어봤으니 그 회한 또한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깊은 상처가 되기도 했다.

돌이켜 보면 나처럼 곡절이 많은 공무원도 드물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이재3과장 시절엔 당시 문제가 되었던 부실상호신용금고를 정리하던 중 정권실세의 상호신용금고 설립 민원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강제 인사 조치를 당하기도 했고 그로부터 10년 후인 90년대 초반엔 뉴욕재무관 근무 뒤 특정 인사권자의 편견 때문에 외청으로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한 경험도 있었다.

이어 97년 정부 직급 1급에 해당했던 ADB 이사직 근무를 하다 재정경제원으로 복귀해선 다시 본부국장으로 강등된 적도 있었고 90년대말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시절엔 어느 지인의 거짓 투서로 한동안 뒷조사를 받은 일까지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시련도 내가 2003년 나라종금 때문에 당한 억울한 옥살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고통이 되어버렸다. 이 때의 그 어처구니없는 일 때문에 내 평생 쌓아 올린 신뢰에 큰 금이 갔을 뿐 아니라 마음에도 커다란 상처가 되어 훗날 병상생활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젠가는 2003년의 '그 말도 안되는 실상'을 꼭 한 번 짚고 넘어가려 했는데 마침 기회가 주어져 당시의 상황을 기록으로 남겨보려 한다. 일부 잘못된 공권력이 내게 그랬듯이 하지도 않은 일을 갖고 모함하고 죄 없는 죄인을 만들어 억울한 옥살이까지 시켜가며 한 인생을 짓밟는 일이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서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나라종금 사태의 전말은 이랬다. 내가 2000년1월 금융감독위원장 직위에 오르기 무섭게 나라종금의 상태가 심각하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나는 금융시장 안정 차원에서 취임 이틀 만에 영업정지 처분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이어 금융감독원 직원을 투입해 필요한 검사에도 착수토록 했다.

그럴즈음 안모라는 나라종금 사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나와 같은 전라남도 보성이라고 했다. 그는 또 검찰 총수를 지낸 내 친구 K모씨, 그리고 역시 검사출신인 후배 B모씨 등과도 호형호제 하는 사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내게도 형님이라 부르며 내 사무실에도 찾아오고 내 친구 K씨와 식사도 함께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하지만 그 안모라는 사람은 그걸 나라종금을 살리기 위한 일종의 로비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나를 아는 체 하는 것과 나라종금을 처리하는 일은 별개였다. 나는 나라종금에 대해 원칙대로 처리할 건 처리한 뒤 금감위를 떠났고 그 후 나라종금은 퇴출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금융감독위원장직에서 물러난 나는 미국 콜롬비아대에 교환연구원으로 1년간 외유를 떠났다가 2002년말 경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런데 국민의 정부시절 나하고 각별하게 지내던 P모씨가 “형님 산에나 갑시다”해서 따라나섰다가 그로부터 뜬금없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P씨의 말인즉 “요즘 정치부 기자들의 말을 빌리면 형님을 두고 나라종금과 관련된 안좋은 소문이 들린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내 비록 금융감독위원장 시절 나라종금을 영업정지 시켰지만 모든 걸 떳떳하게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2003년5월 내겐 날벼락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루는 후배들과 함께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는데 대검 중수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이 온 것이다. 참고인자격이라고 했다. 게다가 나는 죄를 지은 일이 없기에 변호인조차 대동하지 않은 채 무방비 상태로 중수부 소환에 응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검찰의 태도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그들은 나를 향해 느닷없이 나라종금에서 돈을 받았느냐고 다그쳤고 나는 밥은 먹었어도 돈을 받은 적은 없다고 맞받았다. 그랬더니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밥을 얻어먹은 것 자체만으로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긴급구속사유가 된다는 것이었다. 변호인조차 대동하지 않는 나로선 한편으론 황당하고 한편으론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검찰은 나를 계속 몰아세웠다. 문제의 종금사로부터 밥을 얻어먹은 것 만으로도 포괄적 뇌물죄가 된다며 계속해서 압박해왔다. 내가 금감위 부위원장시절 미국가고 홍콩 갈 때 나라종금측이 공항에 와서 1만 달러 씩 줬다는 허위 주장까지 들이댔다. 여기에 금감위시절 내 사무실에 들러 돈을 주고 갔다는 거짓 주장도 곁들였다.

나로선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받지도 않은 돈을 받았다고 하라니 참으로 난감했다. 미국과 홍콩 출장을 갈 때는 총무국장을 데리고 갔는데 무슨 돈이 필요하고 무슨 수로 돈을 받을 수 있겠느냐며 항변했지만 허사였다.

또한 금감위 근무시절 내방에 들러 돈을 줬다고 한날 금감위 건물 출입자기록에 문제의 나라종금 사람 이름은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었고 이를 증빙자료로 내밀었는데도 안하무인이었다.

검찰은 그러면서 절충안을 요구해왔다. 내가 4~5차례 돈을 받은 것으로 돼있다면서도 그 액수가 4,800여만원에 불과해 총 5,000만원이 안 되는 만큼 집행유예 대상이 될 수도 있으니 이쯤해서 수긍하고 가는 게 어떻겠느냐는 구슬림이 있었다. 이런 경험이 전혀 없었던 나로서는 이 악마같은 소굴에서 한시라도 더 일찍 벗어날 요량으로 “당신들 맘대로 하쇼”하고 자포자기 해버렸다.

그러나 그게 화근이었다. 나와 함께 난데없이 수사선상에 오른 후배 P씨는 검사출신 답게 검찰과 나라종금 측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며 끝까지 따진 끝에 결국 무혐의 처분을 받았지만 나는 경험이 전무한 탓에 그러지 못한 게 한스러웠다. 또한 나만 떳떳하면 되겠지 하며 변호인조차 대동하지 않고 출두했던 게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제 와서 후회한들 무엇 하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데...

그래서 나는 법원에 가서 내 결백을 입증하기로 했다. 변호인을 제대로 선임해 대응키로 했다. 하지만 이 또한 녹록치 않았다. 1심 공판을 앞두고 법무부 장관을 지낸 내 친구에게 부탁해 알만한 변호사를 추천 받았지만 변호인의 얼굴이 밝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참여정부 최고위층의 지시로 특정 의도를 갖고 나라종금에 대한 재조사가 이뤄지는 만큼 자기가 아무리 변론을 잘해봤자 결과가 뻔하다며 양심적으로 변호를 하지 못하겠다고 고사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는 수 없이 법무부 검사출신 모 인사에게 1심 변호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또한 나는 무죄를 원했으나 기대하는 결과는 나오지 못했다.

돈을 줬다는 사람과 법정 대질 심문을 요청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대질 얘기가 나오자 관련 당사자들이 야비한 비웃음만 남긴 채 얼굴을 돌리는 것 아닌가. 그 뿐이 아니었다. 내가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알리바이도 대보고 이 기록 저 기록 다 들이대 봤지만 채택되지 않았다. 그들만의 뭔가가 있는 듯 했다. 판사도 검사도 내편은 아무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만 보니 나라종금을 둘러싼 플리바게닝에 내가 당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심지어 법무장관 출신인 내 친구조차도 “예로부터 왕이 바뀌면 항상 전임 정승들이 그렇게 당하곤 했다”며 그만 화를 누르고 마음을 다스리라는 말 밖에 해 줄 얘기가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나는 억울해 죽겠는데 수사관들은 우리 집에 세번씩이나 들러 내 주변을 뒤지고 또 뒤졌다. 하지만 아무리 이곳저곳 다 훑어봐도 나오는 게 없자 수사관들조차 혀를 끌끌 찼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금융감독위원장까지 지내고 서울 강남에 괜찮은 아파트까지 갖고 있어 호화롭게 잘 사는 줄 알고 벼르고 뒤졌건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고 심지어 통장 잔액마저 얼마 남지 않은 걸 보고는 “(이용근 위원장) 참 양심적으로 잘 살았습니다”는 말과 함께 아내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갔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일부 수사관은 날더러 'Mr Clean'이란 별명까지 붙여줬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기 위해 내게 포괄적 뇌물죄를 덮어씌웠던 것이다.

나라종금에선 자기들이 쓸 돈 다 써놓고 출처를 댈 데가 없으니까 나 같은 무고한 희생양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그 일만 생각만 하면 억울해서 밤잠을 설칠 때가 많다.

또한 사실이 이런데도 공권력은 정의의 편이 아니었다. 그래야만 해당 법조인이며 수사당국자들이 높은 평점을 받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당하는 입장에선 평생을 두고도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된 다는 점에서 앞으로 다시는 나 같은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간절하다.  그러나 지금도 검찰에서는 이런일이 자주 일어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참으로 안타깝다.

물론 항소심에 가서 내 억울함이 다소 풀리긴 했지만 그 후 10년 가까이 지난 최근 나는 큰 수술까지 받았을 정도로 그 때 받은 마음의 상처가 내 인생 전체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렸다.

뒤에 여러사람들을 통해 들은 얘기지만 나라종금건은 진즉 종료되었는데 최고위층이 자기측근인 안모씨, 이모씨, 염모씨 등 대선선거자금 수수 문제가 불거지니까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나라종금건을 재조사하게 하여 나와 H모씨를 희생타로 만든것이므로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 변호사의뢰를 하여도 의뢰에 응하지 않았고 검찰이 승산이 없는걸 눈치채며 그 사건을 그렇게 종결시켰던 것이라고 귀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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