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별것 아닌데 왜 사람들은 남에게 상처를 주고 사는지 안타까워

여기 내 사랑하는 가족과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생각나는 바를 두서 없이 적는다.

나는 일제가 소위 대동아전쟁이라고 하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신생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던 어려운 시절에 전라남도 보성 한 시골 농가에서 4남1녀 중 맏아들로 자라났다. 하지만 아버님께서 정미소를 운영한 탓에 별로 어렵지 않은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자상하셨지만 내게만은 지엄하셨다. 내겐 항상 남에게 지지 말고 국가사회에 꼭 필요한 인재가 되라고 가르치셨다. 또 그 바람에 항상 나는 일종의 말할 수 없는 사명감과 명예심, 그리고 자부심을 마음 한구석에 지닌 채 살아가야 했다.
 
내가 태어나 자라던 1940년대는 우리나라의 처지가 말이 아니던 시기였다. 후진국 중에서도 가장 못사는 축에 들었던 암울한 상황이었기에 우린 너무나도 빈곤한 삶을 살아야 했다. 주거는 물론 의생활과 식생활 어느 하나 형편이 변변치 못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의 희망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살아봤으면 하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네 삶의 목표는 그토록 소박하면서도 절박했다.
 
이런 상황 때문이었을까. 나의 어린 시절 꿈은 크고도 원대했다. 훗날 사관학교를 나와 훌륭한 군인이 되어 분단된 국토를 지키다가 그 뒤엔 외교관이 되어 국위도 선양하고 우리의 가난도 극복하는데 일조하리라는 꿈을 꾸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꿈을 꾼 데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다.
 
자나 깨나 아들이 잘 되기만 바라시던 아버지는 틈만 나면 영웅 나폴레옹의 야망에 찬 정복얘기며 이순신장군의 위대한 애국심과 대첩기, 그리고 링컨 미국 대통령의 노예해방과 그의 위대한 인본사상에 대한 이야기 등을 끊임없이 내게 들려주곤 하셨다. 역사적으로 저명했던 분들의 성공담을 귀가 시리도록 들려주심으로써 훗날 내 인생의 행로를 결정하는데 참고토록 하셨던 것이다.
 
이렇듯 가정에선 맏아들로서 부모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고 자랐던 탓에 항상 아우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했고 혹시 동생들이 부모님을 상심시켜 드리기라도 할 때면 무조건 내가 책망의 대상이 되곤 했다. 또한 그럴 때마다 억울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관용과 아량과 포용과 인내, 그리고 희생심을 기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되도록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 무척 힘썼고 그 때문에 억지로라도 공부를 열심히 하려 노력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사관학교에 가려 했으나 시력이 나빠 포기하고 대신 고려대학교 입학을 선택해야 했다. 대학시절 전공은 경제학이었다.
 
당시에도 ‘먹고 대학생’이란 말이 있었지만 나의 대학생활은 낭만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어린 시절부터 큰 꿈과 야망을 키워왔기에 진로문제를 놓고 늘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고 그럴수록 선망과 좌절감이 수도 없이 교차하는 생활을 반복해야 했다.
 
“나는 과연 누구인가?”에서 시작해 “나는 과연 무엇이 될 것인가? 내가 과연 나의 꿈을 실현 시킬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지나치게 큰 꿈을 가진 것은 아닐까?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도대체 무엇인가?”에 이르기까지 나의 대학시절은 고민과 좌절과 숙고의 연속이었다.
 
또한 이런 고뇌 속에서도 미팅이니, 음악 감상이니, 동아리 모임이니 하는 등의 낭만에 빠져볼까도 생각했지만 내 마음이 이를 흔쾌히 허락지 않았다. 내가 잘못되면 다 부질없는 일이 될 텐데 성공하기 전에 일어난 그런 활동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생각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 상급학년이 되어가면서 이런 나의 조급함은 심각성을 더해가고 있었다. 또한 이를 달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공부밖에 없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에 병역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3학년 때 부턴 학군단(ROTC) 생도가 되어 군사학 공부까지 병행해야 했고 그 바람에 나는 새벽부터 도서관 문턱을 수도 없이 넘나들어야 했다.
 
대학시절 더욱 어려웠던 일은 진로문제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하는 것처럼 취직시험공부를 하여 은행이나 회사에 갈 것인가, 아니면 공인회계사 같은 자격시험을 볼 것인가, 또 그렇지 않으면 죽을 각오로 공부하여 고시를 치를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수도 없는 고심을 해야 했다. 당시로선 꿈은 큰데 이를 실천할 만한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구나 고시를 원하고 많은 사람이 그걸 추천 했지만 그러나 그 길은 너무나 험난하고 불확실한 길임을 잘 알았기에 주저하고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군복무를 안한 탓에 당장 고시를 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취직이나 회계사 같은 길은 왠지 끌리지 않아 일단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대학 3학년 때부터 서울대 행정대학원에 가기 위해 온 몸을 던져 공부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행정대학원을 나와 기획원에 인턴 직원으로 취직했지만 원하던 사무관 자리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다시 행정고시에 도전, 꿈에 그리던 시험에 합격하고 사무관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무원은 내게 천직이 되었다.
 
그 후 호남 출신이라는 이유로 숱한 차별과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인내를 거듭한 끝에 금융감독위원장이라는 장관급 직위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인내가 너무도 컸기에 그 열매가 갖는 의미도 남들보다 백배나 컸다. 그렇기에 나는 내 자식과 후배 공무원들에게 강조하고 싶다. 어떤 질곡이 내게 닥치더라도 그 시련을 기회로 여기고 항상 준비하는 마음으로 꿋꿋이 또박또박 살아가면 반드시 웃는 날이 올 것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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