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서 느낀 진실...돌이켜 보면 반성할 것도 많은 게 인생

별로 바쁘지도 않은 은퇴 후의 일상이지만 정기검진하면 우선 시간을 할애 하는 게 힘들고, 특히 내시경검사까지 하게 되면 검진받기가 더욱 힘들 뿐 아니라 거부감마저 드는 게 인지상정일 것이다.

 
2011년 들어 격년으로 받은 건강검진 결과 위내시경 및 조직검사에서 이형성 조직이 나타났고 재조사 결과도 미심쩍다며 검진기관에선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의뢰서를 써주었다. 그래서 대형병원 명의와 상의했더니 확실하진 않지만 수술을 해봐야 안다면서 수술 날짜까지 잡아주었다.
 
2012년 정초 서울대병원에 입원하여 이틀간의 공복과 관장을 한 후 수술실로 향했다. 하지만 외부에서 실시한 검사결과만 갖고는 암의 단계를 판단할 수 없고 43년 전 고시공부하던 시절 불규칙적인 식사와 아스피린 과복용으로 십이지장 천공수술을 받은 그 부분에 또 암에 생겨서 위전절제수술을 해야 할지, 일단 뱃속을 열어봐야 암의 실상을 알 수 있을 것이라는 의사의 설명에 수술실에 들어가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다. 운반용 침대에 누워 수술침대로 옮겨갈 때를 기다리는 마음은 온통 불안과 초조함의 연속이었다.

TV 드라마에서나 봤던 일들이 내게도 벌어지고 있었다. 해바라기모양의 공만큼 큰 전구가 수술대를 훤히 밝히고 초록색 가운을 걸친 의사와 간호사가 바쁘게 수술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나는 하나, 둘 숫자를 세어보라는 마취의사의 지시에 따라 전신마취 속으로 아련히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마취 과정의 그 아련한 기억 속에서도 과연 수술이 잘되어서 회복실을 거쳐 병실로 옮겨 가게 될 것인가? 아니면 수술할 필요조차 없을 만큼 병이 악화되어 그냥 다시 덮고 중환자실로 가게 될 것인가? 불과 몇 시간 안에 생사가 교차할 수 있다는 불안감과 공포감이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한참 후 의식이 조금 돌아와 회복실 앞에서 눈을 떠보니 수술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거의 사색이 된 얼굴로 가족이 날 반기고 있었고 그제서야 아마도 수술이 잘 되었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수술을 통해 추가적으로 얻은 내 생애동안 사소한 일에도 감사하며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야겠구나, 그리고 남에게 유익한 일을 하며 살아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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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나는 2인실 일반병실로 옮겨졌고 의사는 내게 금방 회복할 것이라고 용기를 주었다. 수술 후 닷새째 되는 날 밤 약간의 고열현상이 나타나 다시 정밀검사를 받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별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왔고 바로 다음날 퇴원하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나는 수술이 끝나고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내내 중병을 앓는다는 것, 암에 걸려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치료의 단계 마다 불안과 공포의 연속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수술하고 퇴원하기까지 걸린 불과 몇 주는 그야말로 생과 사를 오가는 힘든 기간이었고 몇 주가 아니라 몇 년과도 같은 기나긴 기간처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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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원할 때와 달리 퇴원할 때는 마음이 훨씬 가벼웠다. 다만 퇴원교육을 받으면서 앞으로 내 삶이 편치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암 생존율이 높아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식사나 운동, 사회생활에 있어서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집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몇 주간 요양하리라 마음먹고 퇴원한 날 부터 가족들이 마련한 식사로 하루 종일 먹기만 하는 삶이 시작되었다. 조용한 빈방에 마련한 침대에서 식탁을 왕복하면서 소량을 잘 씹어 하루에 아홉 번 먹는 훈련을 하느라 힘에 겨웠다. 하지만 그렇게 시작한 수술후처치도 아랑곳없이 이튿날 오후부터 다시 열이 올라 재입원하는 신세가 되었다. CT촬영 결과 수술부위에 아주 작은 틈이 생겨 가스도 새고 또 약간의 장염이 있어 치료가 필요한데 이것이 아무는데 얼마의 기간이 소요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다시 불안과 초조의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재입원 뒤 15일간 금식 뒤에 수술부위는 다 아물었고 장염도 깨끗이 나았다며 이제 안심해도 된다는 말과 함께 4,5일만 더 있다가 퇴원해도 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어떻게 보면 위암수술 그 자체보다도 합병증 치료가 더 힘들고 더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 위암의 진도가 1B에 지나지 않아 항암치료는 받지 않아도 된다는 진단이었다.
 
생각해보면 2012년1월1일 입원하여 입춘인 2월4일에 퇴원하였으니 한 달 이상 병원 신세를 진 셈이었다. 아울러 정기검진을 받은 2011년9월부터 시작된 지난 몇 개월은 눈코 뜰 새 없이 지옥과 천국을 드나드는 격랑의 시간들이었다.
 
또한 이 기간 내내 일희일비 하면서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불안한 마음으로 방황했던 나 자신을 돌이켜 보면 역시 삶에 대한 인간의 집념이 얼마나 강한 것인가를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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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말경 나는 남산 순환로를 빠른 걸음으로 단숨에 왕복하고 나서 저녁을 먹으려 식당에 들어선 순간 섬뜩함을 느꼈다.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수술 후라 감기에 걸리면 안되는 상황이어서 다음날 서울대병원 응급실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응급실 진단 결과가 좋지 않았다. 무엇보다 염증지수가 18을 넘어 위험하니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이 나왔고 다시금 지긋지긋한 병상생활이 시작되었다. 주치의 소견으론 수술부위에 염증이 생긴 것이므로 그 부분을 집중치료 해야 한다고 했다. 다시 복부에 구멍을 뚫어보니 환부가 5cm쯤 곪아있었고 10cc정도의 고름도 빼내야 했다. 호스를 꽂은 채 15일간 또다시 금식의 험로가 시작되었다. “원인이 무엇일까? 과도한 운동? 식사 부주의? 고혈당? 고령?”...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다시금 답답한 하루하루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보약이라고 했던가. 입원 18일 만에 완치되어 퇴원할 수 있게 되었다. 체중은 무려 12kg이나 줄어 있었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몰골이 처량하게 보였다. 마치 나치 독일군에 끌려서 형장으로 향하는 불쌍한 유태인의 모습이랄까?
 
생각해보면 생과 사도 그러려니와 살아있어도 건강한 체구와 야윈 체구의 구분이 이렇게 현격한데 그간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 것 마냥 생각하고 살아 온 것이 너무나 후회스러웠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사람이든 국가사회든 한번 큰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방심해선 금물이라고 말이다. 항상 어려웠던 때를 생각하며 겸허하게 처해진 현실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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