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화웨이, 3년 전 롯데의 기억을 지우지 못한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중국이 미국과 무역전쟁, 첨단기술전쟁을 벌이면서 그동안 한국 등 다른 관련국에 대해서는 자신들의 간절한 입장을 설명하는 태도를 보여 왔다. 그런데 이제는 좋은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뉴욕타임스의 8일 보도에 따르면, 지난 주 중국 정부는 미국의 마이크로소프트와 델, 한국의 삼성, SK 관계자들과 회의를 갖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행정부가 미국의 첨단기술을 중국기업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에 협조할 경우 엄중한 결과를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델은 모르겠지만, 삼성과 SK와 같은 한국기업에게 중국의 이런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중국 정부는 잘 모르는 듯하다. 잘 알면서도 일단은 허세를 부리는 건지도 모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AP, 뉴시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사진=AP, 뉴시스.

1983년 중국 민항기가 대만으로 망명하려는 납치범들에 의해 한국에 불시착하면서 한국과 중국은 양국 정부수립 후 사상 첫 외교접촉을 가졌다. 이 때 분위기가 상당히 우호적이어서 9년 후의 수교를 예고하는 듯 했다.

중국이 1980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후 2015년까지 두 나라는 민관차원에서 모두 19세기말 열강의 아시아침탈 이전 역사적 동맹관계에 근접해가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한국의 기업들이 미국과 중국의 갈등 사이에 끼여 있었다면, 일방적으로 어느 한 쪽을 선택하기보다 절충을 해야만 하는 기업의 간절한 입장을 관련국 정부에 설득하러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3년의 상황은 전혀 달라졌다.

중국 정부가 화웨이를 데리고 와서 "얘를 구박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있지만, 한국기업들은 앞서 중국시장에서 실컷 두들겨 맞고 쫓겨난 롯데가 더 눈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이른바 ‘사드 보복’을 한다면서 중국인들이 한국 기업에 대해 보여준 모습은 제국주의 시대 전쟁범죄를 저질렀던 일본 기업을 대하는 것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1071년 고려와 송나라의 수교 이후 1000년 동안 몽고의 침략, 임진왜란, 19세기 말부터 시작한 일제의 아시아 침략 등에 늘 같은 편에 서서 함께 싸웠던 양국 민중들의 연대의식 같은 건 중국정부나 중국인들에게 참 하찮은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한국의 기업들 입장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무역 전쟁 이전에 이미 중국 시장은 언제든 모든 사업이 뿌리부터 흔들릴 수 있는 불확실성의 시장임을 배웠던 것이다.

앞서 삼성전자는 톈진 공장 가동을 중단한 데 이어 후이저우 공장의 생산량과 인력도 줄이기로 했다.

예전 같으면, 미국의 조치에 불가피하게 따를 수 밖에 없지만 그에 따른 반대급부를 제시하면서 절충을 모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기업들로선, 언제 또 무슨 일이 발생해 사업이 타격을 받을지도 모르는 불확실한 곳에서 과연 없는 지혜를 짜낼 수고를 할 필요가 있겠냐는 것이다. 이번에도 중국정부가 힘없는 한국기업에도 무역전쟁의 보복을 한다면, 기업들은 오히려 결단을 앞당길 수도 있는 일이다.

보복이란, 없던 것을 처음 받을 때 심각한 것이지 3년 전부터 불이익 받는 ‘훈련(?)’을 해왔다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미 단련이 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를 앞세운 무역공세가 교역의 상호주의를 전적으로 무시할 뿐만 아니라 교역상대국의 전통적 가치관도 무시한다는 국제적 비판도 있다.

이런 점들은 멀리서 날아온 화살이 종이 한 장도 뚫지 못하는 이치처럼, 끝내는 트럼프 대통령만의 구호로 끝나게 마련이다. 어떻든 무역 문제는 합의로 타결되는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투박한 요구가 아주 몰상식한 이기심에서만 비롯된 것도 아니다. 미국과 멕시코의 최근 관세 갈등만 해도 그렇다. 멕시코 국경을 이용해 미국으로 불법이민자가 몰려가는 것을 방치하는 건 멕시코 정부가 비판받을 소지가 다분한 일이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미국의 모습을 보면, 소련과의 냉전시기에 동맹국들에게 제공했던 혜택을 점차 거둬들이는 정책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부터 ‘이제 경제가 성장했으니 수입억제 정책을 폐지하라’는 식의 무역압력을 받고 있었다.

중국 또한 공산주의 국가이면서도 개혁개방이후 일관되게 미국과 같은 편에 서면서 경제적으로 ‘특혜’에 가까운 혜택을 받은 것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어차피 미국은 언젠가는 이런 것들을 예외 없이 거둬가는 곳이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이런 모습이 매우 공격적으로 표현이 됐다.

큰 틀에서 보면 미국과 중국의 무역 갈등에 이런 속성이 담겨있다. 그런데 부처님 손바닥 위의 신세인 한국의 기업들에게 중국 정부가 정색하고 협박을 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나. 오히려 중국이 강조하는 "대국"의 체면만 손상될 뿐이다.

이미 짐을 쌀 심정이 가득한데 "말 안 들으면 쫓아낸다"라는 엄포는 ‘대인(大人)’의 풍모마저 사라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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