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천자와 로마 시저는 뭐가 달랐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16일 새벽 U20 세계청소년축구대회 결승전에서 연주된 애국가는 상당히 벅찬 감동을 가져왔다. 가락이 빠르지 않은데도 이제 경기장을 누벼야 될 우리 선수들에게 실력이외 고무되는 효과를 주기에 충분하리라 보였다.

경기시작 전 국가가 사기를 북돋는데 가장 훌륭한 나라는 단연 이탈리아다. 경쾌하면서 응원단이 따라 부르기에도 좋은 음정을 갖고 있다.

가사에는 "스키피오의 투구를 쓰고"라는 부분이 있다. 로마제국의 장군인 그는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의 한니발을 압도하는 전공을 세운 명장이다.

하지만 오늘날 이탈리아가 로마의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받았는지는 따져봐야 될 점이 많다. 476년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서로마제국을 무너뜨린 후 19세기 가리발디가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할 때까지 1400년 동안 이탈리아반도는 수많은 왕국과 공국들이 흥망했다.

로마가 전성기를 누리던 2세기 무렵, 세계를 로마와 함께 양분하다시피 차지하고 있던 또 한 국가는 한(漢)나라다. 로마와 이탈리아의 관계와 달리, 한나라와 오늘날 중국의 관계는 혈통관계는 상당히 뚜렷하다.

‘수명어천 기수영창(受命於天 旣壽永昌. 하늘로부터 천명을 받아 그 수명은 영원히 번창하리라)’이라는 글이 새겨진 옥새는 비록 현존하지 않아도 당, 송, 명, 청을 거쳐 오늘날 중국으로 국체가 이어지고 있다. 중국의 국체뿌리는 한나라보다도 훨씬 이전 주나라 무왕이 천하를 통일해 구정을 만들었을 때부터 확실한 역사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4대 성인의 하나인 공자가 성인으로 존경한 주나라 주공 단. 오늘날 중국인들의 가치관에 뿌리를 형성하는 인물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 후, 그는 주나라 조정을 이끌고 있어서 봉지인 노나라에 아들 백금을 대신 보냈다. 이웃인 제나라보다 노나라의 보고가 늦어진 원인이 현지의 습속을 일일이 고치려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주공은
4대 성인의 하나인 공자가 성인으로 존경한 주나라 주공 단. 오늘날 중국인들의 가치관에 뿌리를 형성하는 인물이다. 주나라가 은나라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통일한 후, 그는 주나라 조정을 이끌고 있어서 봉지인 노나라에 아들 백금을 대신 보냈다. 이웃인 제나라보다 노나라의 보고가 늦어진 원인이 현지의 습속을 일일이 고치려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고 주공은 "노나라는 끝내 제나라의 속국이 되겠구나"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사진=위키백과 홈페이지.

한나라와 로마가 같은 시대를 지배하는 모습은 상당히 달랐다.

한나라 황제는 한 때 흉노의 기세에 눌려 비단과 쌀을 지급하면서 평화를 얻었다. 그걸로도 부족해 미인을 골라서 딸로 입양시킨 후 흉노의 왕인 선우의 아내로 시집보냈다. 이조차 흉노의 성에 차지 않아 4대 황제인 효경제는 친딸을 연지(선우의 아내에 대한 호칭)로 보냈다.

5대 효무제에 이르러, 흉노에 대해 대대적인 반격을 전개해 사막 바깥으로 흉노를 멀리 쫓아냈지만 그 때뿐이었다. 400여년 후 흉노를 비롯한 5개 주변민족은 양쯔강 이북의 중국을 차지하는 5호16국시대를 열었다.

로마의 황제는 이런 수세에 몰린 한나라 황제와 전혀 달랐다. 로마전성기 때 황제들은 이민족의 침략을 받기커녕 오히려 가만있는 주변민족들을 공격하는 정벌을 일삼았다. 새로 선출된 황제는 즉위직후 자신의 성과를 원로원에 입증해야 할 필요가 절실했다. 제일 좋은 방법이 이민족 정벌로 땅과 많은 노예를 획득해 이를 로마지배층에 나눠주는 것이었다.

로마의 이런 침략적 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 브리타니아에서 발생한 부디카의 반란이다. 여성인 부디카는 원래 로마에 우호적인 부족장의 아내였다. 그러나 그의 남편이 죽자 로마는 일방적으로 동맹관계를 파기해 부디카를 매질하고, 그의 두 딸을 겁탈했다. 마침내 부디카는 브리타니아의 부족들을 대거 규합해 반란을 일으켰다. 당시만 해도 로마의 전성기여서 부디카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8만 명의 로마인 정착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충격을 로마에 안겨줬다. 오늘날 영국 사람들은 부디카의 동상을 세워놓고 그를 존경하고 있다.

브리타니아뿐만 아니다. 로마는 게르만, 북아프리카 등에서 끊임없이 현지인들을 괴롭혔다. 전 세계 모든 사람의 원한이 쌓이고 쌓인 나머지 끝내 로마는 사방에서 쳐들어오는 이민족들을 막지 못하고 멸망했다.

때리기보다 맞은 적이 더 많은 중국 황제들 역시 황궁과 도성을 이민족에게 내주는 일이 5호16국 시대를 포함 네 차례 있었다. 그러나 로마를 차지한 이민족들과 달리 낙양성, 또는 북경에 들어온 이민족들은 오히려 중국에 동화되는 운명을 맞았다. 중국은 침략 받은 수난을 통해 오히려 문화 유전자가 더 단단해지고 땅도 확대됐다.

중국인들이 오래전부터 얘기하는 "부드러운 것이라야 단단한 것을 이긴다"는 교훈을 그들 스스로의 역사로 보여주고 있다.

오래된 서책을 통해 중국인들의 교훈을 배우면서 살아온 사람들로서는 요즘 중국의 모습은 상당히 당혹스럽다.

이들이 강조하던 ‘대인적인 기풍’과 역행하는 일이 빈발한다. 캐나다에서 중국이 아닌 홍콩의 정체성을 강조했다해서 현지의 중국유학생들이 거센 비난을 쏟아냈다는 외신뉴스도 있다.

오래전부터 국제적 문제가 되고 있는 일로, 중국이 인공섬을 쌓아놓고 영해권까지 주장해 필리핀 대만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그 지역의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지만, 전통적으로 가장 넓은 영토를 보유해 온 나라가 작은 섬 하나를 늘리려 천하와 분쟁을 자초하고 있다. 이는 분쟁당사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미국과 무역 갈등이 깊어지자 중국 역시 애꿎은 제3국들에게 자기 입장을 강요하는 모습도 빈번해지고 있다. 잠시 비바람이 거셀 때 몸을 피해서 오히려 천하의 공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폭풍우를 몰아오고 있다.

중국에 대한 오늘날의 역풍은 한국과 일본이 경제성장기에 겪었던 것과 다른 점은 있다. 특히 15억 인구 중국에 대해서는 기존 선진국들의 경계가 나타나는 측면은 있다.

하지만 중국 역시 이에 대해 패권주의로 맞서기 때문에 세계의 대중들이 중국에 대한 부당한 견제를 공감할 계기가 전혀 없다.

어쨌든 지금 홍콩에서 10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모습에서 세계인들은 홍콩 자치정부가 아닌 중국을 바라본다. 홍콩 자치정부 수반이 누군지 아는 사람도 세계에 얼마 되지 않는다.

어릴 때인 1970년대 기억에 홍콩은 아시아 한복판의 선진유럽 도시로 여겨졌다. 그랬던 곳의 사람들이 오늘날에는 집회에서 한국의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고 있다고 한다.

영국의 홍콩점령은 19세기말 제국주의가 아시아에서 저지른 침략범죄의 상징이다. 당시의 100년 조차 협약이 빈말이 안되게 중국이 홍콩을 돌려받은 것은 제국주의 범죄를 청산한 것으로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오히려 홍콩의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끊임없는 항쟁으로 번영이 쇠퇴한다면 이로 인해 과거 제국주의 시대를 칭송하는 자들의 기를 살려줄까 우려되기도 한다.

1980년 개혁개방 이후 죽의 장막을 거둬내고 세계인들에게 ‘원래 대인풍이 이런 거다’ 보여주는 듯하던 중국이지만 최근 10년은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예전 로마황제들이 단기실적에 급급하다 대국을 망치던 교훈을 돌이켜보게 된다. 그 때 로마와 경쟁하던 조상들의 지혜를 중국인들이 잊지 않는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안정될 것이다. 큰 나라가 큰 나라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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