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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젊은이가 나를 "아무개 씨"라고 부르면 이를 어째?
20대 젊은이가 나를 "아무개 씨"라고 부르면 이를 어째?
  • 장경순 기자
  • 승인 2019.06.23 14: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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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호칭 인플레이션'... '씨' 다음엔 '사장님', 그리고 '회장님'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정치에 잔뜩 빠지기 전인 1970년대 ‘대통령의 웃음’이란 책을 지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미국 대통령의 유머 사례를 모은 책인데, 여기에 독립투사인 월남 이상재 선생의 이야기도 있었다.

젊은 시절의 변영로 시인이 YMCA에 영어를 배우러 다녔다. 그가 거리를 걸어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변정상 씨"라고 불렀다. 돌아보니 월남 선생이었다. 변 시인의 부친이 변정상 씨다.

"어찌해서 저를 아버지 이름으로 함부로 부르십니까"라고 젊은 변영로가 따지자 월남 선생은 "갑자기 자네 이름이 생각 안 나서"라고 해명했다. 그리고는 "이 사람아. 그 씨가 다 같은 씨지 뭘 그러냐"고 특유의 농을 덧붙였다.

월남은 어느 날 강연에서 "겨울인줄 알았는데 개나리가 만발한 봄이구먼. 봄이 왔으니 옷을 벗어야지"라고 말했다. 이날 청중 가운데 일본경찰이 가득했었다. 한국인들은 일본경찰과 형사를 "개"와 "나리"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월남이 이를 빗댄 농담을 하며 능청스럽게 두루마기를 벗어젖히자 청중들 사이에서 익살맞은 웃음이 터졌다. 그는 이런 농을 즐기는 인물로 잘 알려져 있었다.

월남과 변 시인 일화에서 엿보이는 건, 당시만 해도 ‘아무개 씨’라는 호칭이 눈앞에 있는 사람의 부모를 언급할 때도 용인이 됐다는 것이다.

변 시인이 월남에게 항의한 건 "왜 나를 아버지 함자로 부르느냐"지 우리아버지를 아무개 씨라고 한 것이 아니다.

지금은 상대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이 사람 자체도 "씨"라고 부르기 대단히 조심스럽게 됐다.

‘씨’ 또한 분명히 최소한이나마 높임말이 분명한데, 현실은 "너"라고 부르는 것이나 다를바 없게 됐다. 이 말을 쓸 수 있는 건 직급과 나이가 모두 한참 높은 가운데 상대가 직장에서 대리 ‘벼슬’도 못할 때 정도다.

‘씨(氏)’는 원래 그 사람의 혈통부터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탄생한 어휘다. 그런데 여기저기 "김철수 씨" "이영희 씨"가 넘쳐 나다보니, ‘나는 특별한 대접을 받아야한다’는 관념의 소유자들은 전혀 만족을 못 느끼게 됐다.

그래서 대안이 된 것이 ‘사장님’이다.

1960년대부터 한국사회는 "거리에서 ‘사장님’이라고 불렀더니 앞서 가는 아저씨 세 사람이 뒤 돌아보네"라는 노랫말 비슷한 것이 있었다.

사장님도 두루두루 널리 쓰인 지 최소한 50년이다. 한국 사람들이 식상할 시기가 훨씬 오래 전에 지났다.

그래서 동네에서 큰 집에 사는 노인들한테는 "사장님"이라고 부르면 무례한 것이고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한다.

이렇게 한국인들의 호칭에는 끊임없이 ‘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나는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한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크면, 이전 시대 호칭의 용도는 쉽게 사라지고 사회는 또 새로운 예의범절과 어휘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풍토는 암만 봐도 ‘속물’스럽고 나는 좀 깨우친 사람처럼 행동하고 싶은 충동이 언제나 가득하다.

그래서 곰곰 생각해 보는 것이 만약 20대 젊은이가 올해 50 중반인 나를 "장 아무개 씨"라고 부른다면 어떻게 하느냐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김수현은 김창완보다 사실은 수 백살 더 많은 외계인이며 생명의 은인이다. 그래서 김창완은 깎듯한 존댓말을 쓴다. /사진=SBS홈페이지 동영상 화면캡쳐.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김수현은 김창완보다 사실은 수 백살 더 많은 외계인이며 생명의 은인이다. 그래서 김창완은 깍듯한 존댓말을 쓴다. /사진=SBS홈페이지 동영상 화면캡쳐.

"아니 이런 돼먹지 못한 집안을 봤나. 내가 네 아버지뻘인데" 이런 식으로 ‘10콤보’를 발동하는 건 두고두고 나 또한 ‘속물통합 완료’ 느낌을 줄 것 같다.

내 이름을 알고 있으니 대충 내가 이 나이까지 뭘 얼마나 이뤘는지는 아는 젊은이일 것이다.

불량한 녀석은 아니므로 ‘씨’라도 붙인 것인데, 나에 대해 일체의 존중할 이유가 없다는 표시일 것이다.

내가 존중받느냐 못 받느냐는 상대의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다. 내가 오늘날까지 해 온 것을 저 친구는 존중하지 않는다는 건데, 그걸 옆구리 찌르듯이 "선생님이라고 해라" 식으로 강요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꼭 필요한 일이 있어 부른 것이면, 거기에 걸맞게 정확히 절차에 따른 해법을 제시해주고 대화를 일찍 마무리하는 게 상중의 상책일 것이다. 저 친구가 먼저 우리 둘 사이에 각별한 우호를 주고받을 일이 없다고 선언한 셈이니 불필요한 대화는 길게 할 필요가 없다.

사사건건 네가 나를 최상급의 된 호칭으로 부르는지에 혈안이 돼 있으면, 그 또한 만만치않은 스트레스다.

적대심이나 공격의사를 드러낸 것만 아니라면, 자네가 나를 존중하는 만큼 자네 마음대로 하라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 훨씬 더 여유롭고 아늑하게 사는 길이다.

가끔 한국 사회의 존댓말이 문제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존댓말이 무슨 죄인가. 존댓말은 내가 그 사람에게 경의를 표현하는 아주 우아한 수단이다.

존댓말이 죄가 아니라, 존댓말 들을 자격 없는 자들이 나도 듣겠다고 강요하는 게 죄다.

상대가 나에게 존댓말을 쓰면 그걸 고마운 줄 모르고 얕잡아 봐도 되는 줄로 여기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대학교 입학하고 분명히 내가 후배인줄 아는 선배들이 나한테 철저하게 경칭을 쓸 때, 드디어 어른세계로 들어왔다는 참신한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저 선배들이 아직은 나하고 친하지 않다는 표시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더욱 행동거지를 가다듬어야겠다는 계기도 됐는데, 요즘은 이런 의식들이 좀 희박해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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