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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통치의 르네상스?
세습 통치의 르네상스?
  • 장경순 기자
  • 승인 2019.06.30 13: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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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시대에도 '성공적 세습'이 존재하는 비결은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모든 역사를 지금의 민주주의가 탄생하기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이를테면 자유롭게 국가원수를 선출하는 민주주의만이 사람다운 국가고, 그 이전 왕조시대는 모든 사람이 왕실의 노예로 시달린 ‘암흑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고려, 조선시대 모두 임금 한 사람이 국가와 백성을 소유했던 시절인데, 한국인들이 여기서 벗어남으로써 진정한 국가를 갖게 됐다고도 주장을 한다. 일제의 침략을 미화하는 친일 식민사관이 끼어들기 딱 좋은 사고방식이다.

과거의 우리 조상들은 절대로 오늘날 우리를 주인공으로 만들기 위한 예고편의 인생만 산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현실을 헤쳐 나가기 위한 치열한 고민을 하루도 빠짐없이 지속하며 살아간 사람들이다.

"이 나라는 왕 씨의 나라" "이 씨의 나라"와 같은 사극 속 대사들은 왕조시대가 법체계 유지의 방편으로 만들어낸 전달력 높은 구호들일 뿐이다. 왕들이 실제로 정치를 해 나간 과정을 보면, 본질적으로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대통령들이나 다를 바가 없다.

정치를 잘 하는 핵심은 위정자가 더 많은 사람의 편에 서는 것이다. 그 이치는 상고시대 부족장들이 다스리던 때부터 오늘날에도 변한 것이 없다.

왕들은 자기 후손이 더 많은 사람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소수의 편에만 서다가 새로운 권력에게 핍박받게 되는 일을 가장 두려워했다. 왕이 세자를 가르친 핵심 내용은 더 많은 사람의 편에 서는 방법이다. 대세를 파악하는 능력을 가르친 것이다. 이것이 왕조마다 50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지속한 비결이다.

군주란, 인류 태초에 악마의 지령을 받고 인간위에 군림하려 등장한 존재가 아니다. 이 또한 당시 기술력 등의 한계 속에, 가장 많은 사람이 공감할 방식에 의해 등장한 지도자였다.

혈통세습이 확고하면, 그 나라의 지식인들은 차기왕권을 노리는 다툼에 인생을 소모할 이유가 전혀 없으니 다른 능력을 키우는데 몰두했다. 역사가 시오노 나나미는 오스만투르크의 술탄에 대해 "모든 사람이 술탄 앞에서 노예였다. 이는 다시 말하면, 술탄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이 평등했다"고 평했다. 술탄의 탄탄한 통치력을 가진 오스만투르크는 로마 멸망 이후 유럽 대륙전체를 근세이전까지 끊임없이 위협하던 초강대국이었다.

지금부터 32년 전의 29일은 6.29 선언이 나온 날이다. 1987년 이날,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는 국민들의 6월 항쟁에 굴복해 직선제 대통령선거를 받아들인다고 발표했다. 이후에도 곳곳에 군사독재의 잔재가 남아있었지만, 한국의 민주주의는 이날 회복된 것으로 평가된다.

선거를 통해 정권교체도 경험한 한국국민들에게 더더욱 세습 통치는 역사 속에나 존재하는 유물이 됐다.

오늘날 세계에는 아직도 세습통치를 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다. 과연 한국의 국가경쟁력이 이들 나라들보다 뛰어나느냐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이 질문 자체를 허탈하게 만드는 점도 있다. 한국은 정치체제에서는 민주주의가 이제 완성단계다. 그러나 경제구조도 이렇게 민주적이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 /사진=뉴시스, 백악관사진앨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왼쪽)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오른쪽). /사진=뉴시스, 백악관사진앨범.

한국 경제의 핵심인 대기업들의 소유구조는 철저하게 세습으로 승계되고 있다. 재벌들은 회사지분의 승계에 걸림돌이 되는 상속세를 마련하기 위해, 중소기업 전통시장의 영역까지 마구 파고들어 회사를 세워가며 일감몰아주기와 갑질 횡포를 벌이기도 한다.

현실이 이런 마당이니, 국가원수를 선거로 뽑게 됐다고 해서 한국이 모든 세습통치 국가를 원시적이라고 평가절하하기도 어렵다. 물론 대재벌 경영권이 세습으로 넘어가는 게 한국만의 일은 아니다. 미국의 언론재벌 폭스는 루퍼트 머독 회장이 지난해 1월 쓰러진 후 아들 래클런 머독이 경영을 이어받고 있다. 하지만 이 나라에는 물려받는 재벌도 있지만, 애플을 창업한 스티브 잡스처럼 순전히 자기만의 노력으로 대기업을 만드는 사람들이 계속 등장한다. 한국에서는 창업1세 때나 볼 수 있던 일이다.

그렇다고 모든 재벌을 지금 당장 공영화하거나 총수지분을 강제매각하게 한다면, 이는 오히려 세계적 일류가 된 브랜드를 우리 스스로 망치는 길이 될 것이다.

아무튼 경제 현실이 이러니 한국이 무조건 세습통치 국가에 대해 심정적 우위를 자랑하기만은 어렵다는 얘기다.

지난주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최근 중동정세의 핵심인 세 명의 통치자가 한국을 다녀갔다. 앞서 다녀간 사람은 타밈 빈 하마드 알 타니 카타르 국왕과 셰이크 모하메드 빈 자예드 알 나흐얀 아랍에미리트(UAE) 왕세제다. 빈 자예드 왕세제는 빈 살만 왕세자처럼 실질적인 국정을 총괄하고 있다.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제를 석유수출 의존에서 탈피해 선진화시키는 ‘사우디 비전 2030’을 주도하고 있다. 탄탄한 국정장악력을 가진 그를 서구 언론은 약칭인 MBS로 부른다.

세습통치에서 장점이 있다면, 결재구조의 단순성이다. 수시로 시행되는 선거결과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니 통치지가 통 큰 결단을 할 수 있다. 한국의 재벌총수들도 공유하는 장점이다.

1980~1990년대 반도체 투자가 절실할 때, 선진국 기업 총수들은 이사회 결정에 얽매여 결단을 쉽게 내리지 못했지만 한국 재벌들은 총수의 결정으로 바로 투자에 나설 수 있었다. 혹시라도 이것이 재벌 지배구조를 미화하는 것으로 오해되지 않게 덧붙인다면, 총수의 결단이 잘못된 것이면 그룹은 해체되는 운명을 맞고 국가 경제에 커다란 짐이 된다.

세습통치 국가를 무조건 얕잡아봐서는 안 되는 또 하나 이유는 이 나라 정치 역시 민주주의를 완전히 외면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세습이 유지되는 건, 그 나라 국민들이 여전히 왕실혈통에 대한 애착을 유지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결정이 사라지면, 왕정도 함께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그건 나중의 얘기고, 어떻든 지금 당장 국민들은 국가가 세워질 때 창업군주의 업적이 혈통으로도 계속 전수되기를 원한다는 얘기다.

국민들이 계속 이런 생각을 갖도록 성과를 만들어야 되는 것은 이 나라 왕실이 해야 할 고민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의 재벌 3세들은 창업조부, 부친에 이은 자신의 시대에 주주와 소비자들이 만족할만한 경영성과가 필요하다. 그래야 국민과 정치권이 "지배구조를 확실히 개혁해야 되긴 하는데 성과가 좋은 지금은 당장 뒤흔들지 말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데 노력은 창업조부의 몇 백배 이상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의 기억은 어제 일어난 일도 오늘 뉴스에 밀리는 법이다. 하물며 3대 이전의 일에 대한 기억은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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