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스트릿저널이 17일 보도한 중국에서의 반일 시위 현장의 격렬함은 당초 생각했던 관제데모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대열에서 이탈한 진압경관에 대해 분노한 시위대의 폭력이 쏟아지더니 다급히 동료를 구하러 달려온 진압부대는 순식간에 현장을 장악해 버렸다.

 
일본계 기업체의 경찰 저지선에는 끊임없이 폭죽으로 보이는 물건이 날아들었다. 경찰마저 격앙된 나머지 바닥에 있는 물건을 시위대를 향해 던지기도 했다.
 
특히 일본이 제국주의 시절 만주를 침략했던 만주사변 발발일이 18일이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지금 중국내 일본 기업의 공장들은 휴업에 들어가고 있고 길거리의 일본인들은 “한국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고 있다.
 
격렬한 시위만 없다 뿐이지 한국의 일본에 대한 정서도 갈수록 분노에너지를 축적시키고 있다.
 
1980년대 중반, 미국과 소련의 냉전에 극에 달했을 때, 한국이나 중국, 일본 모두 친미 반소의 동맹을 이루던 것과 비교하면 너무나 달라진 정치 지형이다.
 
그런가 하면 중국과 한국은 반일이란 공통 정서를 통해 양국 국민들 간의 유대감이 강화되고 있다. 이명박 정부 들어 다소 소원해진 한중 정부간의 관계 자체는 뚜렷한 변화 징후는 없다. 그러나 양국 국민들의 상대적 우호감이 높아져 한국 기업들의 중국내 마케팅이 약진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미국 법정의 배심원 평결에서 패배한 삼성이 미국 대신 중국 시장을 개척하면 된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또 추석 명절을 맞아 중국 관광객들의 행선지가 일본에서 대거 한국으로 바뀌고 있기도 하다.
 
한편 가장 치열한 대결현장인 남북한 관계에서도 특이 현상이 나타났다. 북한의 김정은 정권이 안정단계에 접어들었다는 이유로 한국의 국가 신용등급이 올라갔다. 국제 신용평가기관 중 가장 깐깐한 것으로 알려진 스탠더드앤푸어스(S&P)의 결정이다.
 
지금까지의 상식과 어긋나는 현상이 아시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드는 근본적인 의문점이 있다.
 
‘지금까지의 상식’이란 과연 ‘언제부터 지금까지’의 것이냐는 거다. 남북한은 대결해야 하고 한중일은 소련의 팽창에서 맞서던 것은 길어봐야 1950년대부터의 상식에 불과하다.
 
19세기말 서구 제국주의 침탈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질서가 헝클어진 고작 100여년의 역사일 뿐이다.
 
지금 동북 아시아는 새로운 균형점을 찾아가는 거듭나기가 진행 중이다. 이 지역의 수천년 지속된 균형이 열강 침략기에 잠시 교란, 왜곡됐다가 다시 정상 균형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변화는 그 과정에서 잠시 혼란을 연출한다.
 
힘의 흐름을 내다봐야 한다.
 
일본이 오늘날 아시아 ‘공공의 적’으로 추락한 것은 일시적인 현상을 영구적인 것으로 착각한 때문이다.(이는 일본의 정치세력에 국한된 말이다. 대다수 일본인들의 본심에 깔려 있는 평화 심리를 왜곡해 군국주의 죄악을 이어가려는 위정자들로 인해 억울한 피해를 본 사람들이 바로 지금 중국 내의 일본 기업인들이다.)
 
19세기말 서양 문물을 10년 빨리 받아들인 것으로 얻은 ‘시간적 잇점’을 영구한 것으로 고착시키려다가 끔찍한 반인류적 죄악을 50년 동안 저지르고 말았다. 아시아의 새로운 균형은 일본의 그 같은 시간의 잇점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쪽으로 흐르고 있다.
 
한국 또한 일본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근대화에 있어서 한국이 중국보다 다소 앞선 것은 민족 자체의 역량이 아닌 ‘일시적으로 좀 더 빨랐던’ 때문에 불과하다.
 
인터넷 곳곳에 깔려있는 중국에 대한 경멸적인 댓글들이 조금이라도 여론 주도층의 정서로 감염돼서 자리 잡을 경우 지금 일본인과 일본 기업이 겪는 일들이 남의 일이 아닐 것이다. “반미하는 놈들이 보기 싫어서” 일부러 중국과 갈등을 조장하는 짓의 어리석음은 맹목적 반미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