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서 안전장치만 믿고 방심하다 대놓고 무시하면 휴지조각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스포츠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어른세계의 승부를 가르치는 중요한 매개다. 드라마와 달리 스포츠는 각본이 없다. 예상 못한 상황을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선수들의 모습은 장차 운동선수가 될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된다.

그런데 26일 한국을 다녀간 이탈리아 프로축구팀 유벤투스는 스포츠 팀으로서는 특이하게 이런 승부의 지혜보다 상거래에 대한 교훈을 남기고 떠났다. 자신들이 의도해서 남긴 교훈이 아니다. 이들의 처신이 운동보다 경제에 대한 반면교사를 남기고 떠났다.

유벤투스는 이날 한국의 K리그 올스타와 시합을 가졌다. 가장 관심은 이 팀의 최고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출전이었다. 행사를 주최한 더페스타는 호날두가 45분 이상 출전한다고 알려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입장권 가격이 평소 K리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다. 경기가 열린 서울월드컵경기장은 홈팀인 FC서울의 홈경기 때 어른 일반석이 1만4000원, VIP석이 3만원이다.

유벤투스 경기는 최하 3등석이 3만원, 2등석 7만~14만원, 1등석 15만~30만원, 프리미엄존은 25만~40만원에 달했다. 그런데도 예매 두 시간 반 만에 매진됐다.

하지만, 비싼 가격을 내고 입장한 사람들이 호날두의 출전을 본 시간은 45분 이상이 아니라 0초였다. 출전을 안 한 것이다.

유벤투스 역시 욕먹을 짓을 한 것을 알았는지 '월드컵 골키퍼' 잔루이지 부폰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이 죽기살기로 싸워 3대3 무승부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으로 한국팬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었다. 가뜩이나 안팎으로 뒤숭숭한 일이 많은 요즘 한국은 호날두와 유벤투스에 대한 분노로 주말을 보내고 있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6일 유벤투스의 경기가 끝난 후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26일 유벤투스의 경기가 끝난 후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나서고 있다. /사진=뉴시스.

계약상 위반이 명백해 보이니 프로축구연맹과 더페스타는 위약금을 청구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유벤투스가 선선히 잘못을 시인해 위약금을 물어낸다고 한들, 그게 누구에 대한 보상이 될 것이냐다. 이날 입장한 6만5000 명은 호날두가 45분 이상 출전한다는 발표를 믿고 비싼 표를 산 사람들이다.

여기서 첫 번째 교훈이 등장한다.

위약금과 같은 계약 안전장치는 계약을 어기지 못하는 예방수단에 불과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대놓고 계약을 무시하면 6만5000 명 팬들에게 위약금 규정은 휴지조각일 뿐이다.

계약서에 위약금 조항이 있다고 해서 두발 쭉 뻗고 잘 수 있는 게 아니다.

미국 프로야구가 태평양과 대서양을 오가며 매일 경기하듯, 그저께 중국에서 출전한 선수들이 당일치기로 한국에 와서 시합을 할 수 있는지 심각한 의심을 해야 할 일이었다.

계약서의 위약금 조항을 너무 믿은 모양인데, 이 세상에는 내가 힘들어도 계약은 지킨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다음 교훈은 중개자의 맷집이다.

이번 경기를 주관한 더페스타와 같은 중개기관은 거래 당사자 양쪽에게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약속이 어긋났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중개기관이 모든 책임을 질만한 규모를 갖고 있을 때 거래당사자들이 안심하고 계약에 나설 수 있다.

잘못한 쪽의 책임을 확실히 물을 수 있는 안전장치가 있다 해도 중개자의 맷집은 중요하다. 대개의 경우, 계약을 파기한 쪽은 자신들만의 논리로 최종적 심판이 날 때까지 버티기 마련이다. 중개자의 맷집이 없다면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을 버틸 힘이 없다. 과연 이번 소동은 유벤투스와 프로축구연맹, 더페스타가 어떻게 마무리를 지을 지 주목된다.

이게 가장 중요한 분야가 금융이다.

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은 자신의 신뢰도와 맷집을 수단으로 해서 다른 거래당사자들이 안심하고 계약에 나설 수 있게 한다. 수 없이 많은 대출을 하다보면, 부실이 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은행의 거대한 몸집은 부실대출 한 두 사례는 훨씬 더 많은 우량대출의 불가피한 부작용으로 여길 뿐이다.

거래상대방뿐만 아니라 중개기관 역시 계약이행에 차질이 발생했을 때 우선 자신이 모든 책임을 떠맡을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살펴봐야 된다.

유벤투스가 속한 이탈리아는 축구뿐만 아니라 오페라 등 문화적으로 배울 것들이 참 많은 곳이다. 그러나 금융에 대해서는 이탈리아가 G7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별로 주목할 만한 것이 없었다.

이번 호날두 소동으로 이탈리아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커다란 금융의 교훈을 남기게 됐다. 그러나 이것은 유벤투스가 미리 커리큘럼을 마련해서 의도대로 진행해 남긴 교훈이 아니라 자신들의 황당한 처신으로 남긴 반면교사다.

한번 계약을 저버리면, 최소 10년 동안 그곳은 신뢰의 불모지가 된다는 금융의 또 하나 교훈도 타산지석으로 남기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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