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롤로그. 나만의 '천지창조'

[최공필 박사,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인간 역사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는 신이 인간을 신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하면 종교를 가진 모든 인간은 신을 자신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믿고 있다는 얘기다.

우리보다 상위세계의 신들이 우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으로 상상을 하면, 신들의 세상에 대한 상상을 하기 편해진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보다 더 높은 차원의 세계에 대한 상상은 새 천년의 시작을 앞두고 있던 1990년대 말 굵직한 영화로 등장했다.

이런 내용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매트릭스'다. 주인공 앤더슨이 고소득 컨설턴트로 일하면서도 매일 지각을 하고 일상에 흥미를 잃은 이 세상이 사실은 매트릭스로 창조된 허구 세상이다. 더 높은 차원의 상위 세계를 찾아 허구를 깨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혁명이 3편에 걸쳐 이뤄졌다.

또 하나 상위세계를 다룬 뜻밖의 영화가 있다. 일본 영화 '링'이다.

TV에서 한을 품고 죽은 소녀의 귀신이 기어 나오는 불세출의 명장면으로 공포영화의 최고반열에 올라갔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이게 끝이 아니다. 모두 4편의 영화가 나왔다.

원작 소설의 얘기는 더욱 깊게 이어진다. 최종스토리에서는 가상세계와 상위세계가 등장한다.

사실 소설의 2편은 작가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수습할지 걱정이 들 정도로 결말을 맞는다. 세상을 너무나 망가뜨렸다. 1편 영화의 말미는 도저히 비디오귀신을 물리칠 방법이 없어서 주인공 여기자가 자기 아들만 살리고 다른 사람을 대신 희생시키려는 절망적인 결말을 맞는다.

영화는 여기서 두 편이 나왔다. 하나는 1편을 만든 감독이 스스로 스토리를 새로 만든 것이고 또 하나는 다른 감독이 원작소설의 2편대로 만든 것이다.

소설 2편은 저주를 받는 방식이 비디오뿐만 아니라 소설, 영화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한 전염으로 이뤄진다. 이걸 통해 세상은 모두 비디오에서 기어 나왔던 그 소녀의 복제인간으로 가득 찬다. 세상을 되살릴 방법은 전혀 없어 보이고, 1편 절정의 장면에서 TV에서 나온 소녀를 보고 죽었던 남자 주인공도 되살아나 냉소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런데 이 세계가 사실은 여러 대의 슈퍼컴퓨터로 만들어진 가상세계였다는 것이 소설 3편의 시작이다. (4편은 내용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들의 일화를 모은 외전이다.)

1편에서 비디오귀신을 보면서 절규하는 남자 주인공은 사실 상위세계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죽음의 순간에 그는 상위세계를 향해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 줘"라고 외치는데 그걸 현실세계의 프로젝트 연구팀이 보게 된다. 연구팀은 남자 주인공의 유전정보를 연구원 중 불임이었던 사람의 정자에 입력해 주인공을 이 세계, 즉 상위세계로 데려온 것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특수성을 이용해 이 세계에 만연했던 질병을 고치고 비디오귀신으로 뒤덮인 가상세계를 되살리러 돌아간다.

이런 공상과학 스토리가 공포소설로 알려진 링의 결말이다.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벽화 '아담의 창조'의 한 부분. /사진=위키백과 퍼블릭도메인.
미켈란젤로의 위대한 벽화 '아담의 창조'의 한 부분. /사진=위키백과 퍼블릭도메인.

인간은 신 앞에서는 한없는 어린아이일 뿐이다.

아이들은 일을 하는 대신 놀이를 한다. 그런데 이 세상 모든 동물의 어린아이들 놀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어른들이 일하는 모습을 흉내 내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아이들은 노는 것을 통해 어른이 되는 훈련을 한다.

인간은 어려서는 어른의 흉내를 내는 놀이를 한다. 요즘의 인간들은 어른이 되서도 어른만의 놀이를 하고 있다. 어른만의 놀이 역시 더 어른이 하는 일을 흉내 내는 것이다. 신을 흉내 내는 것이다.

신이 세상을 창조하듯, 인간은 가상세계를 창조하는 놀이에 몰입하고 있다.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소설가와 영화제작자들만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들의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할 수 있는 놀이였다. 지금은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편집기능을 통해 자기만의 세상을 만들어 푹 빠져들 수 있다.

낮에는 보고서가 틀렸다고 부장에게 호통을 듣고 살지만, 저녁에는 또 어떤 세상을 창조해볼까라는 설렘을 안고 퇴근길에 나선다.

그럴듯하게 게임 상황을 만들어놓으면 그 가운데 한 캐릭터에 자신을 이입한다. 지극히 빈약한 나라에서 출발했지만, 백만대군을 이끌고 최후의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인물에 자기 이름과 자기사진을 넣는다. 이것은 신의 강림을 흉내 내는 놀이다.

퇴근 후 펼쳐지는 전혀 다른 세상. 호텔 델루나에서는 사후에만 눈앞에 화려한 호텔이 나타나지만 가상세계에 빠지는 사람들은 매일 저녁 이 세계에 빠져든다.

스포츠게임업체들이 프로야구 게임에 한 시즌뿐만 아니라 다음 해로 이어가면서 통산기록을 세워갈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하자, 현실에서 응원하는 팀에 뼈아픈 기억만 가진 사람들은 대신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현실의 내 팀은 '8888'의 팀으로 놀림을 받지만, 내 PC 안에 들어있는 내 팀은 현재 5연속 우승의 뉴욕양키즈 기록을 갈아치웠다.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 내는 이런 놀이가 스트레스를 해소해 주는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아직 조심스럽다. 밤의 세계는 밤의 세계 나름의 스트레스를 만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것도 스트레스네"라고 하면서 멀리할 현대인들이 아니다. 현재 벌어지는 상황이 그렇다. 게임도 스트레스라고 멀리하기커녕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인터넷으로 연결해서 더 복잡하고 더 스트레스 받는 게임으로 만든다. 퇴근 후 가상세계는 이래서 더 복잡해진다.

내가 창조한 이 공간에서 적잖이 약도 오르고 하다보면, 연휴나 주말을 몽땅 바쳐서 이 또 하나의 세계에서 끝장을 보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이걸 이해 못하는 사람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시간 낭비'다. 그러나 한번 세상을 창조해 본 맛이 들면 이건 컴퓨터 자판 두들길 힘이 있는 동안은 절대 버릴 수 없는 또 하나의 자아다. 신의 천지창조를 흉내 내는 놀이는 지금 다양한 형태로 현대인들의 주위에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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