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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세계 '황제', 현실에선 분노한 아버지가 기다려
가상세계 '황제', 현실에선 분노한 아버지가 기다려
  • 장경순 기자
  • 승인 2019.09.15 13: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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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형편은

[최공필 박사,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지극히 존귀한 지위에 올라 이제부터 이 세계가 정말 재미있어져야 할 시점인데 불가피한 차질이 생겼다.

현실세계의 내가 졸기 시작했다. 현실세계의 시간으로는 새벽 5시를 넘었다. 몇 번 깜박깜박 졸기도 했다. 이대로는 공들여 점령한 많은 도시를 뺏길 수도 있다. 지금은 컴퓨터를 끄고 내일(사실은 오늘이지만) 맑은 정신으로 돌아올 때를 약속하는 게 제일 현명하다.

자다가 한번 깨 보니 아침 10시쯤은 된 거 같다. 물 한잔 마시면서 이 때 쯤 일어나면 오늘은 평소보다 긴 하루를 벌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방문밖에 나서기는 곤란하다. 아버지가 마루에 나와 있다. 아직 출타를 안하셨다.

"얘는 또 밤새고 여태 자는 거야?"라고 못마땅해 하시던 것도 몇 년 전 일이다. 이제는 아무 말씀이 없다.

그래도 냉장고 물 한잔 따라 마시러 나가면서 마주치는 건 불편하다. 그냥 자고 있는 것으로 하는 게 제일 무난하다. 아버지는 이제 너 같은 놈 달관했다는 듯 엄마한테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를 하고 계시다. 그러다 또 잠이 들었다.
 

정상의 연기자 최불암은 한국인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진=뉴시스.
정상의 연기자 최불암은 한국인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사진=뉴시스.

깨보니 오늘도 12시가 넘었다. 오늘은 정말 뭔가 의미 있는 일 좀 해야겠다던 용기가 절반은 빠져나가 버렸다. 이제야 물을 마시러 나와 보니 또 집에는 아무도 없다.

매일 이 때는 마음이 처량하다. 내 방문을 쳐다보다가 대문을 나서는 엄마 아버지 심정이 어떨지 자연스럽게 추측해보는 시간이다.

남들이 보기에 어떨지 모르지만, 모든 의욕을 잃어버린 폐인은 절대 아니다. 제 자리 찾아 일할 의지는 분명히 갖고 있다. 다만 좀 겁이 날 뿐이다. 안 해 보던 일을 하게 되면 스트레스를 과연 얼마나 견딜지는 불안하다.

아무 일자리나 가기도 싫다. 너무 허름한 직장을 다니면, 엄마가 집에서 놀고 있는 걸 볼 때보다 더 서러워할 거 같다.

그래도 간절한 마음을 잃지 않은 결과, 드디어 출근과 퇴근을 하는 인생이 찾아왔다. 그럭저럭 엄마한테는 다닐만한 회사라고 말은 했는데, 절대로 엄마가 우리 회사를 와 볼일이 없을 것이란 확신에서 한 얘기다.

현실은 가상세계 같지 않아서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다. 익히 그러려니 했던 일이다. 회사의 부장 과장이 가상세계의 내 의형제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남달리 나쁜 상사들도 아니다. 이곳에서 큰 성공을 거둘 거란 예감 같은 건 전혀 없지만, 저녁에 나만의 가상세계가 돌아가도록 현실세계를 뒷받침해 주는 한 축으로 삼을 만은 한 것 같다.

그러다가 고객하고 한판 싸움을 벌였다. 고객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한 주장으로 일관하는데, 우리 쪽은 책임소재를 규명해야하기 때문에 내부에서도 조금 다른 소리가 나왔다.

이것도 전혀 예상 못한 일은 아니지만, 이 직장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는 됐다.

흔히들 하는 얘기로 이것저것 불만이라고 들이댈 거리는 좀 있다. 그런데 지금 내가 앉아있는 이 자리를 아예 없애버려도 회사에는 그다지 큰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내가 전혀 기여를 못하는 건 아니다. 자부심을 느낄 만한 일도 몇 번 있었다.

문제는 그 기여도가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꼬박 근무해야 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점. 정규급여에 4대 보험까지 다 받아가면서 수행할 만큼의 직무가 아닐 거 같다는 점이다. 이 회사가 그래도 돌아가는 건 다른 누군가가 받는 것 이상으로 엄청나게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서는 돈도 일할 만큼만 받고, 근무도 일하는데 필요한 시간만큼만 나오겠다고 제안하고 싶다. 물론 턱도 없는 얘기다.

회사로서는 일을 시킨 만큼만 돈을 주는 것이라서 이익이지만, 그렇게 판단할 수 있는 체계와 제도를 갖고 있지 못하다.

이런 소리 꺼냈다간 쓸데없이 배운 것만 많다고 철학자 흉내 낸다는 말만 듣는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회사 자체도 언제까지 영업을 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요즘 정보 많은 애들은 인터넷뿐만 아니라 사회관계망 통해서 필요한 제품 정보를 다 알아가지고 이런 회사 통하지 않고도 원하는 물건을 얼마든지 산다.

아직은 컴퓨터는 알아도 인터넷은 모르거나, 상거래는 전통적 방법만 신뢰하는 노인들 덕택에 일거리가 있는 회사다.

내가 아무리 의욕적이고 성공적으로 일해도 언젠가는 회사 자체가 없어져 또 다시 해가 중천에 뜨도록 집에서 잠을 자는 인생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가득하다.

가상세계의 황제인 내가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이런 문제가 곳곳에 널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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