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관련 대자보, 반박하는 것 또한 지식인다워야 한다

서울 홍대입구역에서 열린 홍콩시위 지지 집회. /사진=뉴시스.
서울 홍대입구역에서 열린 홍콩시위 지지 집회.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한국 대학생들의 홍콩 시위 지지 표명에 대한 일부 중국인 유학생들의 대응이 문제가 되고 있다. 장차 세계2위 경제대국을 이끌어갈 지식인들인 이들이 한국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있는 모습은 아시아 사회의 미래와 관련해서도 주목된다.

우선 홍콩시위에 대한 기자의 개인 견해를 밝혀둔다. 첫째, 그 어떤 체제와 이념의 국가에서도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거셀 때 위정자들은 그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1980년 광주, 1989년 천안문과 같은 불행한 비극은 그 어떤 경우에도 반복되지 말아야 한다.

둘째, 홍콩시민들의 민주화 요구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이상 중국은 이를 국가전복 음모로 대응하지 말아야 한다. 이는 동시에 시위대가 '하나의 중국'이나 중국의 주권을 부정하는 행동까지 벌이지는 말아달라는 염원이기도 하다. 오늘날 대부분 국가가 중국과 수교를 맺을 때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했다. 이미 강제송환법 철폐로 빛나는 승리의 이정표를 세운 시민들이 선을 넘은 요구로 역풍을 자초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한 만약 1997년의 홍콩반환을 부정하는 주장까지 나온다면 이는 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아무리 홍콩이 영국의 통치하에서 눈부신 발전을 했다 해도 그 시작은 19세기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침략한 범죄행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 역시 일제 침략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싸움을 지금도 지속하고 있는 마당에 제국주의 열강의 과거 침략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지금 홍콩시민들에 대한 염려가 앞서서 그렇지, 대부분 이곳 사람들 역시 홍콩의 중국 주권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위를 지지하면서 대학가에 게시되는 일부 대자보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상당히 멀리 앞서가거나 지나친 생각을 담고 있을 수 있다.

이것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해 대자보를 훼손하는 등의 행위는 특히 지식인 사회에서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반달리즘이라는 것을 분명히 강조한다.

1994년 스탠포드대학교 게이해방 동상이 먹물을 뒤집어쓰는 반달리즘을 당했다. 이 사건 이후 동상은 원상회복될 때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꽃다발 세례를 받았다. 동성애에 관심이 없던 사람도 반달리즘에 대한 반대의사 표시로써 게이동상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던 것이다.

뉴스에 따르면 홍콩시위를 가지고 중국학생들과의 논쟁이 심하게 벌어진 곳은 서울대 연세대학교 등이다. 이 나라 최고의 명성을 가진 대학들이다. 대자보를 붙인 학생이나 떼 간 학생이나 입학하기 정말 어려운 이 학교의 구성원들로 보인다. 장차 세계를 이끌어갈 지식인들이다.

그렇다면 이들의 논쟁 또한 자신들의 지적인 명성에 걸맞은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식인들이란, 두 사람이 모여도 생각이 달라야 마땅한 사람들이다. 당연히 이처럼 중요한 시사에는 더욱 더 큰 찬반의 갈림이 있게 마련이다.

걸려있는 대자보에 반박하고자 하는 바가 가득하다면, 그 또한 학내구성원의 일부로서 자신의 의사를 당당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표현하라. 마음에 안 드는 남의 의견을 훼손하는 건 오히려 상대방의 정당성을 한없이 높이고 나 자신을 끝없이 비하시킬 뿐이다. 많이 배운 사람들의 대자보는 내용이 어려울 수 있지만, 뜯겨져 나간 대자보는 누가 잘하고 잘못한 것인지 글자 하나 못 배운 사람도 한 눈에 판단이 선다.

고향 떠나 머나먼 곳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생각이 같은 사람들이 소수에 불과한 현실을 절감할 수는 있다. 때로는 단지 숫자의 우세만을 앞세운 말도 안되는 억지가 대자보의 대세를 이룬다는 절망감에 휩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식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지식인 사회의 장점이라는 확신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약 중국 학생들의 격을 갖춘 주장이 부당하게 매도를 당하고 있다면 그걸 가장 먼저 알아보고 공감해 줄 사람은 바로 옆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는 동료 학생들이다. 부당한 논박을 당하고도 지식인의 자세를 절대 잃지 않고 논쟁에 임한 친구의 기억은 평생을 변치 않을 그에 대한 존경심이 된다. 지금은 홍콩을 논하고 있지만, 앞으로 아시아와 세계를 이끌어갈 젊은이들이 갑론을박하거나 서로 공감할 일은 수없이 많다. 무슨 주제를 토론했는지는 쉽게 잊혀 지겠지만, 그 친구가 보여준 도량과 풍모는 평생의 기억이 될 것이다.

특히 요즘은 페이스북과 같은 매체를 통해 사소한 일도 '바이럴(viral)' 해지는 세상이다. 10 여 년 전에 비해 세상과의 소통이 급격히 늘어난 중국인들이 유독 이런 '바이럴 마케팅'의 피해자가 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한국인들도 1980년대 외국 방문이 급증하던 시기, 해외에서 현지의 관습이 생소해 의도하지 않은 마찰을 일으키곤 했다. 하지만 이때는 인터넷조차 없던 시기고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기 전 외국에서는 배운 사람 정도만 한국을 인식했었다.

지금의 중국인들이 처한 상황은 당시 한국인들과 아주 많이 다르다. 동서양이 19세기 얼굴을 접한 이후 중국은 절대 모를 수 없는 나라가 됐다. 거기다 현재는 중국 경제가 세계 2위지만 언젠가 세계 1위가 될 것이 필연적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되는 경계감까지 가세한다. 이런 것들로 인해 같은 행동도 중국인이 하면 더욱 집중적인 바이럴 마케팅의 표적이 된다. 극히 일부 중국인의 사소한 행동을 트집 잡아 "저런 나라가 제1대국이 되면 살기 힘든 세상된다"는 식의 공세가 덧붙는다.

이럴 때일수록 특히 지식인인 중국인 유학생들의 몸가짐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지식인의 몸가짐이라면, 오히려 지난 5000년 역사에서 중국이 전 세계에 수없는 가르침을 남기고 있는 영역이다.

한국의 일개서생도 전쟁터에서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퍼부어댄 계포에게 보복이 아니라 오히려 약속 한마디(季布一諾)를 이끌어낸 한고조의 풍모와 위징의 쓴 소리를 자청한 당태종의 혜안을 흠모한다. 이런 역사의 본고장에서 건너온 중국인 학생들이 선인들의 도량을 저버릴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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