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핵심은 접근도 못하고 어쩌다 던지는 건 과시용 발언뿐

세미나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함. /사진=뉴시스
세미나 모습. 기사 내용과 무관함. /사진=뉴시스

[최공필 박사,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루디거 돈부시 MIT 대학교 교수가 생전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1996년 겨울이다. 지나서 생각해보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환율 석학의 한국방문 역시 바로 다음해 'IMF 위기'를 예고한 듯도 하다.

금융연구원 주최 환율세미나에선 돈부시 교수뿐만 아니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관계자 등 많은 해외전문가들이 금융연구원의 박사들과 함께 이른 아침부터 토론을 벌였다.

오후 늦게 한국 당국자의 주제발표시간이 왔다. 이 당국자는 다른 참석자들과 달리 자신의 발표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미리 배포된 자료가 아닌 오전부터 오고간 얘기는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는 자신의 원고를 보며 계속 읽어갔다.

업무가 많은 당국자여서 기나긴 세미나에서 자리를 지키지 못한 건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일이었다.

돈부시 교수는 앞선 세션에서는 주로 듣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특히 한국의 당국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했다. 당국자의 발표가 끝나자 돈부시 교수는 "한국의 딜러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외환시장의 제한을 해제하지 못한다면 당신네 나라 딜러들은 영원히 성숙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을 제기했다.

당국자는 돈부시 교수의 발언을 들으며 빙긋 웃었다. 그것이 그가 보여준 모든 반응이었다. "예스"나 "노" 한 마디도 없었다.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기 힘든 미소를 애써 유지하며 자신의 발언 자료들을 정리해 자리를 떴다.

돈부시 교수와 같은 석학들은 전 세계에서 강연할 때마다 그에게 질문하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기회를 요청한다. 질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이러한 석학과 잠시나마 토론을 해보고 싶은 것이다.

한국의 당국자에게는 오히려 돈부시 교수가 먼저 의견을 밝히며 대화를 청했다. 하지만 당국자에게 이런 건 별로 관심이 없어보였다. 당시 그는 국장의 지위를 갖고 있었다.

아마 영어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니었나 한다. 이 기관에 국제 세미나에서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둘이 아닐 텐데 굳이 미리 준비한 원고만 읽고 질문에는 한마디 대답을 안하는 사람이 참석했다.

'IMF 위기'전 한국은 '세계화'라는 구호가 가득할 때다. 정부가 앞장서 세계화를 주장하지만 일선기관의 간부들은 사실 이를 뒷받침할 인적 자질을 갖고 있지 못함을 역력히 보여주는 장면의 하나다.

사실 이런 건 영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 당국자의 경력과 학력을 비춰보면, 국제회의에서 말 한마디를 못할 사람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오로지 미소 하나만을 남기고 갔다는 건 그것 이상의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줄 의욕이 전혀 없었다는 얘기다. 당국자에게 당대 석학이 뭐라고 묻는 것 따위는 전혀 관심 밖이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로부터 20년 넘는 세월이 지난 현재, 당국자들의 모습은 많이 달라졌다. 우선, 이런 자리에 말 한마디 안할 사람을 보내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 됐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은, 오히려 아무 말 안하고 돌아오는 게 차라리 더 나을 때도 있다.

여전히 영어와 서구인들의 어울리는 에티켓은 우리에겐 참 생소하다. 뭔가 적극적으로 교류를 하고 싶은데 마땅한 계기를 찾기 어렵다. 궁리 끝의 선택이 '제살 깎기'다.

자신감이 부족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는 뭘 묻기 어렵다. 만만한 게 한국 사람이다.

연사 중 한국사람 얘기 가운데 까마득한 옛날 학교에서 배운 거하고 조금 다르다 싶은 부분을 꼬집어서 질문 하나를 던진다. 다르다 싶은 건 무언가를 고쳐야 한다는 제안이다.

무조건 미국과 유럽의 자산만 안전하고 우량하다는 평가를 누가 무슨 기준으로 하는가. 이런 인식의 허점을 지적하고 아시아 자체의 시장기반 조성을 강조하는 자체가 여전히 달걀로 바위치기같이 힘에 부치는 일이다. 그런데 논의현장에서 같은 나라에서 온 당국자가 내내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 때 손을 들고 나서서 "그건 이론과 다르지 않느냐"며 김을 빠지게 만든다.

한국 사람들이 국제세미나에서 흔히 보여주는 모습이 이렇다.

최근 들어, 제롬 파월 미국 연준(Fed) 의장의 기자회견장에 중국과 일본 기자들의 질문 던지는 모습이 자주 나타난다. 출입매체 기자 중에 재미교포들이 있을 듯도 하지만, 한국 매체 기자는 아직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동안 이 나라 식자들이 보여준 모습에 비춰볼 때, 이 자리에 한국 기자 없는 것이 차라리 다행스럽기도 하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