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적 계열분리는 순환출자 시비를 원천 차단

LG그룹 2대 총수인 구자경 회장의 생전 모습. /사진=뉴시스.
LG그룹 2대 총수인 구자경 회장의 생전 모습. /사진=뉴시스.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아시아 초원의 유목민족은 '말자상속'의 풍속을 가졌다. 아들 가운데 가장 어린 아들은 부족이 싸우러 나가도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혹시 부형들이 싸움에서 돌아오지 못하면 남은 부족을 책임지는 임무를 맡았다.

승승장구하는 부족이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큰아들이 장성하면 그는 아버지의 부족을 물려받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초원을 개척하러 멀리 떠났다. 큰아들일수록 아버지 부족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정착했다. 칭기즈칸의 맏아들 주치가 유럽지역에 책봉된 것이 한 예다. 서열에 따라 아들들은 자신만의 초원을 차지했고 마지막 아버지 임종을 지키는 아들이 원래 부족을 맡았다. 원나라를 실질적으로 개국해 세조가 된 쿠빌라이는 칭기즈칸의 적자 가운데 막내인 툴루이의 아들이다.

한국과 중국 왕조들의 '적장계승'과는 물려받는 아들이 장자와 막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적장계승'은 오늘날 LG그룹의 전통적 승계방식으로도 쓰이고 있다.

LG의 승계는 막내아들 승계는 아니지만 유목민족과 한 가지 매우 중요한 공통점이 있다. 계열분리를 함께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LG의 승계과정에서 2대 구자경, 3대 구본무, 지금의 구광모 회장이 승계를 할 때마다 전임회장의 형제들이 계열분리를 해 LS, LIG 등 새로운 재벌그룹이 탄생했다.

현대사회에서 유교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적장계승'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기 쉽지만, 현실적으로 LG의 상속방식이 계열분리와 함께 가져온 긍정적 효과는 무시할 수 없다.

2000년대 들어 문제가 본격 제기되고, 2010년대에 더욱 재계의 현안이 된 지배구조 개선에서 LG가 상당히 다른 재벌들을 앞서가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이던 2005년, 지배구조 개선은 재계에 참으로 커다란 난관이었다. 특히 순환출자를 해소하라는 유무형의 압력을 받았고 총수일가의 일탈적 경영행위에 대한 처벌도 강화됐다. 어떤 회장은 실형을 살기도 했다.

이 모든 소동에서 LG는 저만치 떨어져 있었다. LG라고해서 이 시절 만사태평한 것은 아니고 휴대전화 부문에서 삼성과 벌어지는 격차, 그리고 특히 카드대란 때 주주들의 신뢰를 저버린 행위로 많은 우려와 비판을 샀다. 그러나 그것은 지배구조 개선과는 전혀 무관했다.

순환출자와 가공자본을 해소하라는 정부와 여론의 압력에 관해서만큼은 LG는 완전한 안전지대였다.

이것은 그룹 스스로 진작부터 미래의 계열분리를 대비해 '단순 수직적'인 지주회사 체제를 갖춘 덕택이었다.

깨끗한 지배구조는 단지 정부로부터의 시달림만 면해 준 것이 아니다. 공격적 외국자본이 LG를 털끝하나 못 건드리는 효과도 가져왔다.

2003년 SK그룹에 대해 대대적인 경영권 공격을 펼친 소버린 펀드는 이 공격에서 8000억 원의 시세차익을 얻었다. SK에 대한 공격을 마무리한 소버린은 다음에는 LG그룹에 대해 대규모로 투자했다. 하지만 LG에 대한 소버린의 투자는 전혀 경영권을 뒤흔들지 못했다. 사실 소버린이 경영권 공격의 의사가 있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거의 유일하게 지주회사 특성을 갖춘 LG는 당초부터 뒤흔들 만한 구석이 없었다. 소버린은 LG에 대한 투자를 마무리했는데 여기서는 500억 원 가량의 평가손실을 입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무렵만 해도 삼성그룹을 비롯한 대부분 재벌들은 정부의 순환출자해소나 지주회사 전환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정부의 이런 방침을 '좌파정책'이라고 비난도 했다.

하지만 10년 세월도 흐르기 전에 재벌들은 자발적인 지주회사 전환에 나서는 자세로 변했다. 냉정하게 따져보니 지주회사가 경영권 빼앗아가겠다는 얘기도 아니고, 또 전환과정에서 총수의 지배권이 더 강화되는 현상도 나타났던 것이다.

오히려 순환출자가 적은 돈으로 많은 회사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한편으로 적대적 펀드의 적은 돈으로 계열사 하나를 뺏기고 그로 인해 그룹 전체도 뺏길 위험이 크다는 인식이 형성됐다.

이와 함께 주기적인 계열분리가 떨어져 나가는 예전의 한 식구들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는 효과가 있다. 거대 그룹의 일원으로 있을 때는 비서실의 관심도 못 받고 다른 계열사가 버는 돈에 얹혀살았을 기업이지만 분리해 나오면서 스스로 살 길을 모색하게 됐다.

이 점은 LG가 아닌 다른 재벌에서도 나타난 사례다. 창업자의 많은 자손들이 계열사를 이리저리 나눠가진 후, 그 가운데 일부는 사업을 망치기도 했지만 가장 경쟁력 있는 자손이 흩어졌던 계열사들을 다시 합치기도 했다.

한국 재벌들에게는 3세, 4세 리스크가 존재한다. 3세와 4세 총수가 이끄는 재벌그룹의 덩치는 창업회장 때에 비해 수 천 수 만 배나 커졌다. 그러나 3세와 4세의 경영능력 역시 전설과 신화를 남긴 창업회장들의 수 천 수 만 배가 되느냐는 의문이 제기된다.

지난해 구본무 회장에 이어 올해 구자경 명예회장이 타계한 LG그룹 역시 이 질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승계와 함께 진행되는 계열분리는 지금의 현실에서 3세, 4세 리스크에 대한 매우 실용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그룹 전체를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막대한 상속세를 벌게 해주려고 빵집, 두부공장을 만들어주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재벌의 체면에 맞는 일이기도 하다.

한 법조인은 LG그룹과 GS그룹의 계열분리에 대해 "역사상 유일하게 아름답게 마무리된 동업"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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