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롯데리아 개점 행사 모습. /사진=롯데그룹 홈페이지.
1979년 롯데리아 개점 행사 모습. /사진=롯데그룹 홈페이지.

[초이스경제 장경순 기자] 지금의 롯데는 유통뿐만 아니라 석유화학, 건설, 렌터카까지 '저 회사들 사이에 무슨 연관 관계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방면에 계열사를 갖고 있다. 한국 재벌그룹들 특징 그대로다. 현재 롯데에 대한 이미지는 사업 자체에서 형성되는 것뿐만 아니라 총수인 신동빈 회장, 그리고 프로야구팀 롯데자이언츠의 세 방향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에는 말 그대로 '과자'기업이었다. 해태와 함께 어린이들의 입맛을 다투는 맞수였다.

오늘날 586이 '국민학생' 즉 초등학생으로, 이들의 입맛을 앞 다퉈 돋우려던 두 기업 가운데 하나다.

이 또래의 한 사람으로 기자가 그 시절 롯데에 대해서 갖고 있던 느낌은 가장 세련된 기업이었다는 것이다. 초등학생의 눈에 그랬다는 얘기다.

당시는 삼성도 전자보다는 '한국 최고부자 이병철 회장의 회사'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삼성전자는 금성(지금의 LG전자)보다 TV나 냉장고를 더 잘 만들기 힘겹던 시절이다.

지금 사람들이 별로 기억하지 못하지만, 1976년의 롯데 대영껌 광고는 정말 선진국 젊은이들 분위기가 돋보였다. 대영껌이란 롯데가 만든 흰색, 노란색, 초록색 포장의 껌으로 세 가지가 맛이 제각각이었다.

"기다릴 땐 롯데 파란 후레시민트, 만날 때는 롯데 노란 주시후레시, 우리 모두 또 만나요 하얀 스피아민트~~"

꽤 예쁜 누나가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즐겁게 데이트를 하는 광고였다.

타계한 신격호 회장과 사실혼 관계의 서미경 씨로 인해 뉴스에서 소개된 '미스 롯데'는 '미스 코리아'보다도 더 많은 인기를 끄는 미녀들을 배출했다. 서미경 씨 뿐만 아니라 명현숙 씨는 가수시절의 이수만 SM엔터테인먼트 총괄프로듀서와 함께 대학가요제를 진행했다. 이 때 대학가요제는 '저속한 문화를 배격한다'는 성격이 강해서 진행자들은 정말 상쾌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야 했다.

해태가 당시 아이들에게 전통적이고 국가적인 과자이미지였다면 롯데는 외국 냄새가 더 강했다. 야구도 롯데는 실업시절부터 롯데자이언트(실업팀과 프로야구팀 시절을 단수와 복수로 구분하기도 한다)라는 팀을 만들어 외국처럼 프로야구팀이 탄생한 느낌을 줬다.

롯데의 이런 이미지가 있었기 때문에 롯데백화점의 전신인 롯데쇼핑센터와 롯데리아가 1979년에 탄생한 것은 이제 중학생이 된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였다. 롯데리아는 햄버거보다도 밀크쉐이크가 더 큰 관심을 끌었다. 한국청소년들이 미국 영화에서만 보던 음료를 드디어 한국에서도 마실 수 있게 됐던 것이다.

세련된 롯데 이미지는 아이들이 20대 성년이 된 1980년대에 약간 좀 '사나이'스럽게 바뀌었다. 롯데자이언츠의 사나운 야구 덕택이다. 물론 초창기도 출범 2년 만에 꼴찌를 기록하는 등 별로 신세가 편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1984년 한국시리즈 극적 우승을 통한 정의실현의 효과는 정말 대단했다. 고의패배(?)를 통해 한국시리즈 상대를 롯데로 선택한 상대팀의 추태를 통쾌하게 응징한 결과가 됐다. 롯데뿐만 아니라  다른 나머지 4개 구단 팬들, 그리고 야구를 대충 보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환영하고 야구를 마음 놓고 봐도 되는 계기가 됐다.

더욱이 이 대회에서 최동원의 4승 신화도 함께 만들어졌다. 실업야구 롯데시절부터 함께 한 최동원 역시 70년대에는 '귀한 집 쌀쌀한 도련님' 인상이 너무 강했었다. 그러나 프로야구에 와서는 몸을 아끼지 않고 투혼을 발휘해 진정한 영웅이 됐다.

롯데자이언츠 덕택에 예전 여성적이면서 약간은 위화감도 주던 롯데 기업이미지가 한국 특유의 근성을 담게 됐다. 그런 와중에 기업은 이제 이것저것 다양한 사업을 하는 곳으로 확장됐다.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기사에서 창업주 신격호 회장의 타계에 대해 "마지막 한국 재벌 1세대가 퇴장했다"고 전했다.

본격적인 2세 시대에 접어든 마당에 과연 무엇을 해야 할지는 내부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을 것으로 본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이미지 혁신의 가장 빠른 길로 롯데자이언츠가 야구를 좀 잘 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메이저리그 호세 칸세코가 연관 검색될 정도의 신본기 헤딩 수비 같은 해프닝이야 야구를 잘 하던 시절에도 좀 있었다.

몇몇 팬들은 프로야구 원년 팀인데도 정규시즌 우승이 없는 것을 결정적 흠으로 꼬집지만,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과 1999년 플레이오프 5차전의 정의에 가득 찬 승리는 한 두 시즌 우승을 초월하는 감동을 야구역사에 남기고 있다.

이런 역사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시절처럼 야구를 조금만 더 잘하면 얼마든지 전국구단으로 발돋움하면서 롯데기업 이미지까지 끌어올리는 엔진이 될 수 있다.

저작권자 © 초이스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